생각해 보면 살아오는 동안 술이 빠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술 덕분에 인연을 이어가고 술 때문에 사람을 잃었고 술로 인해 건강을 해치기도 했었습니다. 술이 화를 불러오고 술이 시름을 잊게 하고 술이 웃음꽃을 피우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수많은 순간 술이 함께 했지만 술이 우리가 가진 문제에 해답을 준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 그 순간의 재미나 시름을 잊게 하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다녔습니다. 한 번에 딱 붙으면 좋았겠지만 운도 실력도 없던 터라 몇 개월 흘러 보내기 일쑤였습니다. 어쩌다 면접이라도 보게 되면 잔뜩 기대를 풀었지만 어김없이 떨어지길 반복했습니다. 그때마다 술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혼자 마실 자신이 없었던 때라 멀쩡히 직장에 잘 다니는 친구들을 불러 냈더랬죠. 다행인 건 그때마다 기꺼이 카드를 긁어준 친구들이 고마웠습니다.
한 직장 안에는 회사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사장과, 월급을 받기 위해 충성을 다하는 직원이 공존합니다. 둘 다 이익을 내야 회사도 지키고 월급도 받아 갈 수 있습니다. 목적은 같지만 저마다 위치가 다르기에 충돌이 자주 발생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기도 하고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니 상대방의 모든 말과 행동이 못마땅하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감정을 해소하고 화를 누그러뜨려주는 게 술입니다. 온갖 일을 다 겪으면서도 퇴근 후 술 한 잔으로 다음 날을 기약하는 게 직장인의 일상입니다.
맑은 날 우울해 본 적 있으세요? 이런 경우는 대개 마음에 먹구름이 낀 상태일 겁니다. 먹구름은 종류가 다양합니다. 저조한 실적일 수도, 집안의 우안일 수도, 존폐 앞에 놓인 직장일 수도, 퇴직 후 먹고살 걱정일 수도 있습니다. 저마다 하나쯤은 먹구름 같은 고민 끼고 삽니다. 당장에 해답이 보이지 않는 그런 문제들이죠. 이런 걱정은 대개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뒤통수를 때립니다. 그때마다 손은 저절로 술에 갑니다. 아무리 마신들 당장 달라지는 게 없는 데도 말이죠.
이처럼 술은 우리 일상 아주 깊숙한 곳까지 자리해 있습니다. 핑계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술을 가까이합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 열에 일곱은 술자리 분위기 때문에 마신다고 합니다. 짐작건대 술에 의지해 평소 담아 두었던 말이 술술 나오는 탓에 후련하기도 하고 또 맞장구쳐주는 상대가 있어서 일 겁니다. 그러니 오늘만 산다는 각오로 부어라 마셔 라로 이어지고 그 분위기가 온갖 시름을 잊게 해 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술자리를 즐기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으로 술이 있기 때문에 삭막한 세상 온전한 정신으로 버텨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번씩 마음에 쌓인 찌꺼기를 술을 통해 풀어내야 다시 채울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술은 순기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적당히 주량껏 건강을 잃지 않을 만큼만 마신다면 술은 분명 순기능을 하는 게 맞습니다. 험한 세상 버텨내는 데 동반자이기보다 가끔 한 번씩 마법을 부려주는 요술봉 정도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술이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저도 20년 넘게 마셔보니 그 말에 동의합니다. 괴로울 때 마시면 술이 술을 부릅니다. 다음 날 후회만 남았던 게 대부분이었죠. 반대로 즐거울 때 마시면 괴로울 때 마시는 것보다는 통제가 됩니다. 다음 날에도 즐거운 기분이 이어지기도 하고요.
2021년 11월부터 술을 끊었습니다. 사는 건 여전히 버라이어티 합니다. 술 마실 일이 숱하게 이어졌지만 술은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어제 4년 동안 키워온 인스타그램 계정을 해킹당했습니다. 살려볼 요량으로 이것저것 해봤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 심정은 한 마디로 참담했습니다.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모조리 씹어 먹어줄게"라는 영화 대사가 딱 제 심정이었습니다. 그래도 술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술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니까요. 기분 변화는 있겠지만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좋은 날에 술이 빠지면 되나!." "이런 날은 술로 풀어버려야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어떤 이유로든 술을 마셔도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단지 술에서 위로받고 울분을 토하고 잊고 싶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고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한 가지는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술이 결코 해결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요. 오히려 맑은 정신일 때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보이고 더 크게 기뻐하고 더 많이 웃을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