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게 살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우리는 '열심히'라는 막연한 형용사를 좇아 각자 자리에서 매일 치열한 하루를 살아내는 중입니다. '열심히', '치열한'은 범위가 한정된 단어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기에 결괏값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에도 차이가 납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화려하고 안정된 삶이 될 수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초라하고 그저 그런 인생을 살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과는 다르지만 이중 누구도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에도 틈틈이 용돈을 벌었습니다. 대학생이 되고 제대한 이후에도 쉼 없이 일을 했습니다. 식당 서빙, 달력 공장, 대형 마트, 건설 현장 일용직 등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풍족하지 않아도 입맛에 맞게 먹고 입었습니다. 또 다양한 경험 덕분에 20년 넘게 이어진 직장 생활도 무난하게 버텨올 수 있었습니다. 아마 다양한 일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열심히 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을지 모를 일입니다.
서른 살부터 지금 직업을 갖게 되었고, 오십 인 지금까지 아홉 번 직장을 옮겼습니다. 한 가지 일을 20년 동안 해왔습니다. 아마 매 순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이 시간을 버텨내지 못했을 겁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 중년도 같은 생각을 할 것 같습니다. 저마다 자리에서 나름 치열했기에 지금 이 정도 살게 되었다고 말이죠. 누구나 당당하게 말할 것입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말이죠. 하지만 안타까운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정작 이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거죠.
'열심히'가 만능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열심히'는 '평균값'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들만큼 누리고 살려면 누구나 치러야 하는 대가였죠.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삶이 만족스럽지 못한 건 어쩌면 그 평균값만큼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이 말이 가슴을 후벼 팝니다. 저 또한 이제까지 삶이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20년 일했지만 내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장 먹고살기 위해 내려놓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열심히 살았다고 말하지 못하는 거죠.
다행인 건 누구나 한 번은 다시 출발선에 서게 된다는 겁니다. 차이가 있다면 '0'에서 시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는 거죠.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 작가와 강사로 활동 중인 저는 8년 전 제로에서 시작했습니다. 태어나서 마흔이 넘을 때까지 작가와는 상관없는 일을 해왔습니다. 전혀 연결고리가 없었죠. 책에 꽂히면서 적어도 두 번째 인생은 더 잘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확신 덕분에 지난 8년 동안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올 수 있었지요. '0'에서 시작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중년에 접어든 70년 대 생은 퇴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스스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한 편으로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평균의 삶을 위해 열심히는 살았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여정은 아니었을 겁니다. 퇴직 이후 무엇을 해야 할지 막연한 이들이 더 많습니다. 열심히 살았다면 이 질문에 어느 정도 답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다가올 인생을 위한 '열심히'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남은 인생이 원하는 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그 모습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제가 찾은 답은 열심히만 살지 말자입니다. 넥타이를 약간 헐렁하게 매야 숨 쉴 여유가 생기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주어진 일에만 매달리면 숨 쉴 틈조차 없는 삶을 삽니다. 그렇게 살아야 남들처럼 살 수 있는 건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퇴직을 바라보는 중년에게는 말이죠. 조금 더 일찍 자기 일상에 여유를 주면 어떨까요? 다른 경치를 구경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낯선 경험도 시도해 보면서 말이죠. 그 안에서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해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원하는 게 거저 주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하물며 뒷산에 오르려면 신발부터 신어야 하는 게 순서이지요.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정상의 경치를 눈에 담는 순간은 오지 않죠. 제 말은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는 의미입니다. '그때 가서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그때는 평생 오지 않을지 모릅니다. 1초 뒤도 알 수 없는 게 우리니까요. 때가 오기를 기다리기보다 그때를 먼저 자기 앞으로 데려오는 겁니다. 우리는 방법은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한 발 내디딜 아주 작은 용기가 필요할 뿐이죠.
퇴직을 앞둔 중년은 '열심히'를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내 일'에만 열심히 매달릴 게 아니라 '내일'을 준비하는 데 조금 더 열심히 매달려 보는 겁니다. 가끔 딴짓도 해보면서 나를 알아가는 거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는 방법도 결국 그 일을 시도했을 때 알 수 있습니다. 거창하게 시작해 잘 되면 좋겠지만, 작게 시작해 소소하게 알아가는 것도 더 의미 있을 겁니다. 이런 시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도 당연하고요. 눈에 보이는 딴짓부터 열심히 하다 보면 분명 바라는 자신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