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술 마실 때 주량을 정해놓고 술자리가 시작된 적 없었습니다. 마시다 보면 어느새 술병이 테이블 위를 채웠습니다. 한 병씩 시키는 이유는 어쩌면 도전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내기하듯이 마셨죠. 마실수록 주량은 늘었습니다. 적어도 지난 기록보다 한 잔은 더 마시려고 애썼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노력이 먹히지 않는 곳이 있죠.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무한 리필 술집입니다. 마셔도 마셔도 줄지 않는 술은 오히려 의욕을 꺾습니다. 늘 술이 채워져 있기에 그만큼 전투력도 떨어집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언제든 마실 수 있죠. 그만큼 술에 애착(?)이 생기지 않는다고 할까요? 애착이 줄어드는 만큼 술자리도 시큰둥 분위기도 애매해지죠.
퇴근을 앞두고 전화를 돌립니다. 약속 없는 친구를 골라냅니다. 온갖 이유를 만들어 약속을 정합니다. 시답잖은 이유에도 술은 술술 들어갑니다. 오늘만 날이라는 각오로 온몸을 알코올로 적십니다. 죽이 맞는 친구들 덕분에 분위기가 끓어오릅니다. 2차는 기본 3차는 예의 4차는 옵션이라는 말도 안 되는 규칙을 따릅니다. 오밤중이 돼서야 슬슬 피로가 몰려오고 출근이 걱정됩니다. 그제야 못 이기는 척 라면 한 그릇 먹고 각자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일상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약속만 잡히면 당연하게 이어졌습니다. 연락해 오는 친구를 나무라는 이 없습니다. 오히려 먼저 연락해 줘 고맙다는 속내는 애써 감춥니다.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규칙은 먼저 말 꺼낸 녀석이 술을 사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술값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마시든 네가 먹든 우리는 친구 아이가!
결혼 전 친구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부르면 달려와 줬습니다. 묻고 따지지 않고 술잔을 기울이며 옆을 지켰습니다. 술값 걱정 없었습니다. 숙취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함께 있는 그 순간에 서로 곁을 지켜 외롭지 않았습니다. 나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대해주는 유일한 존재들이었죠. 그때는 부모님보다 더 의지했고 더 많이 대화했고 더 오래 곁을 내줬습니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은 동전 뒤집는 것보다 쉽게 내려놓았습니다. 아주 가끔 서로에게 쓴소리도 합니다. 이미 서로의 진심을 알기에 마음 상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철들었다고 축하했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서로 지켜봐 왔습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죠.
친구 따라 술만 마시다 망나니가 되지 않을까 싶어 정신을 차립니다. 평생 함께 할 연인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키웁니다. 어느덧 40대, 가정과 직장에서 두 발에 '책임감'이라는 족쇄를 채워줍니다. 멈출 수 없어 질질 끌며 매일 한 발씩 내딛습니다. 그 사이 친구보다 직장 상사, 거래처가 술친구가 되어있습니다. 일로 연결된 사이에서 영혼 없는 술잔만 오갈 뿐입니다. 상사의 빈 잔을 눈치껏 채우고, 거래처 비위 맞추려 개인기도 만듭니다. 그런다고 나에게 친구만큼 애정으로 대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술자리가 끝날 때마다 뱃속은 채워졌지만 마음은 허텃했습니다. 그때 친구들이 그리워 홀로 소주잔을 기울입니다.
친구는 무한 리필되는 맥주 같은 존재인 줄 알았습니다. 늘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죠. 하지만 나도 삶에 떠밀려 정신없이 살듯 그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항구에 정박했을 땐 서로의 곁을 지켰지만, 각자 돛을 달고 먼바다로 나간 뒤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에 생사만 확인할 뿐입니다. 그러다 운 좋게 한날한시에 모입니다. 달라진 외모와 말투에 어깨동무가 망설여집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틈틈이 서로의 잔을 채워줍니다. 술이 들어가고 분위기가 익은 후에야 과거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떨어져 지낸 세월에 힘일까요, 반복해 늘어진 테이프 음악처럼 대화에는 생기가 돌지 않습니다. 아마 저마다 짚어진 무게가 말도 기분도 누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멈추지 않는 시간 덕분에 다음을 기약하며 각자 자리로 돌아갑니다. 기약은 기약일 뿐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을 외치는 것처럼요.
사람은 어느 한순간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외모, 생각 모든 면에서 변화해 갑니다. 변화는 단지 나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내가 달라지듯 주변 사람도 변화를 겪습니다. 변화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되지요. 일에서 가정에서 인간관계에서요. 선택에 따라 결과도 달라집니다. '지금의 나는 이제까지 내가 내린 선택의 결과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분명 저마다 더 나은 결과를 바라고 선택을 이어갔던 삶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과거의 친구는 더 이상 그때 그 모습이 아닙니다. 변하지 않길 기대했다면 지나친 욕심이죠. 각자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살아냈을 겁니다. 달라졌다고 탓할 이유 없다는 의미이죠. 오히려 더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게 진정한 친구이겠지요. 언제든 떠나보낼 수 있을 만큼 근사한 모습이죠.
술자리와 인생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술자리에서 술병이 비면 새 술로 채워집니다. 인생에서도 친구가 떠난 자리는 새 친구로 채워집니다. 그날 기분, 분위기, 안주에 따라 주종이 달라집니다. 친구도 내 상황, 생각, 가치관에 따라 새롭게 만납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 늘 새로운 만남은 이어지기 마련이죠. 관계가 소원해진다고 서로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따라놓고 마시지 않은 술은 맛이 변하기 마련입니다. 오래된 친구 관계도 희미해지긴 마찬가지이죠. 그럴 땐 담긴 술은 부어버리고 새 술을 따라 마시듯 새 친구를 만드는 게 인생을 더 가치 있게 사는 게 아닐까요? 그래도 평생 내 곁에 둘 친구 셋은 끝까지 지키는 의리는 꼭 필요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