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변동 없으시면 회신하지 않으셔 됩니다.'
이름이 저장되지 않은 문자였습니다. 주고받은 목록을 보니 전 직장 거래처였습니다. 퇴직할 때 거래처 담당자에게 퇴직 소식을 알렸는데 아마 이름을 저장해 놓지 않아 놓쳤던 것 같습니다. 지난 설처럼 미리 명절 선물을 보내주려고 주소를 확인하는 문자였습니다. 정중하게 회신했습니다.
'얼마 전 퇴직했습니다.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8년 동안 한 직장에 다니면서 퇴직을 준비했습니다. 한 회사에 이만큼 오래 다닌 적도 처음이었죠. 회사에서 맡은 업무는 구매/공무였습니다. 자재납품과 외주 공사 의뢰를 위해 다양한 업체와 연결되었죠. 회사 규모가 크지 않아 공사 금애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각 공종별 발주 금액도 큰 편은 아닙니다. 대신 8년 동안 단 한 번도 대금지급일을 어긴 적 없었습니다. 거래처에서는 이만큼 좋은 납품처가 없죠.
그러니 명절만 되면 알아서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종류도 다양합니다. 과일은 기본, 햅쌀, 햄세트, 굴비, 고기 등등 푸짐했습니다. 개중에는 미리 집주소를 확인해 보내주는 센스가 돋보이는 업체도 있지요. 그렇지 않은 업체들은 회사로 보냈고 두세 번 실어날랐습니다. 그러니 매번 명절이면 말 그대로 두 손 무겁게 금의환향하는 것 같았죠. 또 가족들에게도 면이 섰습니다.
지난 6월 8년 직장 생활 청산하고 퇴직했습니다. 그리고 맞는 첫 명절입니다. 짐작했던 대로 '빈 손'입니다. 때마다 챙겨주던 거래처 대표는 실종신고라도 해야 할 정도로 연락이 없죠. 내가 먼저 연락할 이유도 없고요. 업무로 이어진 관계였으니 연결이 끊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누구를 탓할 이유 없죠.
퇴직 전 이 순간이 올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막상 현실이 되니 어딘지 모르게 씁쓸합니다. 앞서 퇴직했던 이들이 말해줬던 그런 감정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물론 나에게 예외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도 연결될 이유가 없어진 이상 명절에 선물을 챙길 필요 없죠.
그렇다고 두 손 가득 실어날랐을 전 직장 동료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인생을 담보한 대가로 받는 선물이고, 저는 제가 원하는 인생을 산 대가(?)를 치르는 중입니다. 만약 선물이 아까웠다면 여전히 직장에 다니고 있었겠죠. 물론 명절 선물이 전부는 아니지만요. 월급이 주는 안락함과 나라에서 인정하는 빨간 날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건 분명 매력적이기는 합니다. 직장인들 거의 다 쉬는 오늘도 저는 출근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느니 말입니다. 해야 할 일이 끊이지 않는 삶입니다.
직장인과 퇴직 후 삶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퇴직 후 삶을 경험해 보기 전에는 막연한 불안감만 있었죠. 하지만 막상 부딪쳐보니 직장인으로서 경험해 보지 못할 전혀 새로운 세계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스스로 정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거죠. 그로 인해 수입은 물론 인간관계 등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회사에 다닐 땐 막연했던 것들이었죠.
한 가지 확실한 건 다시 직장인으로 돌아갈 선택은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녹녹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1인 기업가로 존재할 수 있는 이 세계가 주는 매력은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무궁한 가능성'은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가장 큰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