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임의 미학

by 김형준

일주일 만에 하얀 화면과 마주했습니다.

벼르고 벼른 시간이라 집중력을 끌어올립니다.

엉덩이 힘은 제법 있는 편이라 잔뜩 힘을 실었습니다.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생각이 선명하진 않지만 어쩌면 시간 안에 완성할 수 있겠단 기대가 듭니다.

그분이 오시면 좋겠지만 오늘은 아닌 것 같습니다.

책을 들쳐보고, 먼 산을 바라보며 글의 꼬리를 잡아가 봅니다.

오늘 같이 애매한 날은 책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생각과 책이 맞아떨어지면 그나마 한 편 뚝딱 써지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러길 바라며 자판을 다시 두드립니다.

작은 펄럭임에도 흔들리는 촛불처럼 근근이 이어갑니다.


예기치 못한 현실과 맞닥뜨립니다.

제법 기온이 떨어졌기에 마음을 놓은 게 화근이었나 봅니다.

잘 정돈된 카페라 더더욱 마음이 놓였나 봅니다.

눈 앞을 스치는 작은 움직임에 몸이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귀가 가려운 것 같습니다.

다리를 흔들어 봅니다.

뒷 목에 손이 갑니다.

또다시 귓불로 손이 갑니다.

온몸이 가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과민반응 - 감각, 신경, 감정이 예민하여 작은 자극에도 지나치게 민감하게 일어나는 반응

'과민 반응'이란 의학용어로 이해됩니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자극에 몸이 반응합니다.

여름이면 특히 더 합니다.

그나마 올여름은 60일 이상 이어진 장마로 인해 덜 힘들었습니다.

'반사이익'이었습니다.


반응이 시작되자 집중력이 흩트려집니다.

자판에서 손이 멀어집니다.

손은 몸의 이곳저곳을 방황합니다.

뜨거운 볕에 논 바닥이 갈라지듯 단단했던 생각도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갈라진 틈을 비집고 들락 거립니다.

글이 산으로 가려고 합니다.

가는 글을 고이 보내야겠습니다.

붙잡아 봤자 잡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잘린 글은 서랍에 고이 모셔둡니다.


다시 화면과 마주합니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니 질 수 없습니다.

전략을 수정합니다.

지금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과민 반응'

손이 가는 대로 놔둡니다.

생각이 가는 대로 흘려보냅니다.

귀도 만지고, 다리도 긁고, 목에도 손을 댑니다.

서서히 희열을 느낍니다.

어느새 스크롤이 이만큼 내려와 있습니다.

회심의 미소를 지어봅니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버티면 부러졌을 겁니다.

받아들였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늘은 저의 승리로 끝날 것 같습니다.


'모기'

오늘은 내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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