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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속도보다 리듬

by 김형준

나는 승부욕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지 않았다. 등수가 밀리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겼고, 시험에 떨어지면 노력하지 않은 탓이라 생각했다. 승진이 늦어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다. 이기려 애쓰지 않으니, 져서 괴로울 일도 없었다. 이게 젊은 날 내 인생의 ‘무기이자 약점’이었다. 비교하지 않으니 평화로웠고, 대신 발전도 더뎠다. 쉽게 말해, 마음은 편했지만 속도는 느렸다.

당신이라면 어떤 삶을 택하겠는가 — 불안하지만 빠른 길인가, 느리지만 평화로운 길인가.


50이 되어 퇴직을 준비하며 깨달았다. 보이지 않게 세상은 이미 서열이 정리되어 있었다. 30~40대에 얼마나 치열하게 준비했는지가 50 이후 삶을 갈랐다. 미리 대비한 사람들은 자산도, 목표도, 정체성도 있었다. 그들의 단어는 늘 비슷했다. 치열함, 경쟁, 생존, 절박함. 그리고 그 밑바닥엔 언제나 열등감이 깔려 있었다. 뒤처지는 걸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마음, 그 마음이 그들을 살리고 동시에 괴롭혔다.


열등감은 인간의 본능이다. 뇌과학자들은 말한다.

“열등감은 자신을 비교할 때 분비되는 미세한 통증 신호다.”

즉,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볼 때 느끼는 그 따가운 감정이 성장의 촉매다. 문제는, 이 통증이 오래가면 중독이 된다는 것이다. 경쟁심이 동기부여로 작동할 땐 유익하지만, 상대를 깎아내려야만 안심할 때, 그건 이미 중독의 단계다.


책을 한 권 내는 데 평균 2년이 걸렸다. 수십 번 원고를 고쳐도 늘 아쉬움이 남았다. 그럴 때면 주변이 보였다.

나보다 잘 쓰는 작가, 더 주목받는 신인. 그들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하지만 그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미 인쇄된 글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결국 나는 그 책만큼의 작가일 뿐이었다.


유명 작가들도 자신의 글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늘 “이번 작품은 아쉽다”고 말한다. 그 차이는 단 하나다. 그들은 아쉬움에 머물지 않는다. 이미 세상에 나간 글은 과거일 뿐, 다음 원고가 더 나아질 걸 안다.

후회 대신 도전으로 방향을 바꾼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비교는 멈춤이고, 성장은 이동이다.


50이 되어 퇴직을 결심했다. 조금 더 버티면 안정은 얻을 수 있었겠지만, 나는 비교보다 자유를 택했다. 돈 대신 하고 싶은 일을 골랐다. 그게 나의 마지막 사치이자 첫 번째 용기였다. 남들은 “조금 더 버티라”고 했지만,

나는 이미 오래 버텼다. 이젠 살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쓰기 위해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30대를 돌아보면 늘 경쟁의 소용돌이였다. 누군가는 이미 앞서가고, 나는 제자리였다. 그때는 몰랐다. 사람은 각자 잘하는 게 하나씩 있다는 걸. 문제는 그걸 일찍 아느냐, 늦게 아느냐뿐이었다. 누군가는 일찍 알아채고 속도를 낸다. 나는 늦게 알아채고 방향을 바꿨다. 둘 다 옳다.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순례이기 때문이다.


남보다 앞서야 안심이 되는 사람도 있다. 그게 나쁘진 않다. 하지만 한 번쯤은 물어야 한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지?”

속도가 빠르다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건 아니다. 길을 잘못 잡으면, 더 빨리 멀어진다.


그래서 나는 요즘 ‘속도보다 리듬’을 생각한다. 남의 발을 보며 달리는 대신 내 발걸음에 귀 기울인다. 그럴 때 신기하게도 피로가 줄고, 시야가 넓어진다. 남의 성공이 더 이상 나를 흔들지 않는다. 누군가 먼저 도착하면 박수를 치고, 내가 늦게 도착하면 풍경을 더 오래 본다. 속도는 다르지만 방향은 같으니, 결국 모두 도착한다.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루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 그 감정을 인정하고, 통제하고, 활용하는 것.

그게 성숙이다. 남의 성취를 보며 마음이 쓰일 때는 이렇게 물어본다. 나는 무엇을 잘하고 있는가. 그 답을 찾는 순간, 비교는 사라진다. 비교는 시선을 밖으로 향하게 하지만, 성장은 시선을 안으로 돌린다.


이제는 안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남의 잣대로 스스로를 재는 순간,

삶의 고유한 결이 희미해진다. 나는 내 속도로, 내 문장으로, 내 시간표대로 간다. 그게 느려도 상관없다.

느림 속에도 리듬이 있고, 그 리듬이 나를 만든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승진하고, 누군가는 탈락한다. 그 사이에서 나는 조용히 글을 쓴다. 비교 대신 성찰을, 경쟁 대신 성장의 문장을 남긴다. 내가 걸어온 이 속도가 완벽하진 않지만 적어도 나만의 속도라는 점이 좋다. 이제는 누가 더 빨리 가는지가 아니라 누가 더 오래, 자기답게 걷는지가 중요하다. 그게 진짜 승리다.



https://youtu.be/cuVPi_Z6H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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