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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삶, 흔들림의 기술

by 김형준

워라밸은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 즉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한다. 그런데 ‘일’과 ‘삶’은 명확한데, 정작 ‘균형’은 모호하다. 저마다 무게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저울의 중심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퇴근 후 맥주 한 잔을 균형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퇴근 후 자격증 공부를 균형이라 한다. 결국 워라밸의 정의는 사회가 아니라 당신의 시간표가 결정한다.


법대로 일하고, 야근 수당 받고, 휴가 다 쓰면 균형일까? 아니다. 퇴근 후에도 마음이 일에 묶여 있다면 이미 불균형이다. 반대로 일에 쏟은 노력이 정당히 보상받고, 그로 인해 내 삶의 가치가 높아진다면 그 역시 훌륭한 워라밸이다. 균형은 “일과 삶의 분리”가 아니라 “일과 삶의 합의”다.


내 20년 직장 생활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직장만 다녔던 12년’과 ‘퇴직을 준비했던 8년.’ 전자는 일상이었고, 후자는 전환기였다.


처음 12년은 소소하게 평온했다. 작은 회사에 다녀서 야근도, 보고서 폭탄도 없었다. 겉보기엔 워라밸의 교과서였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시간은 많았지만 의미가 없었다. 출근 전, 퇴근 후, 주말까지 그 많은 시간이 있었는데 정작 나를 위해 쓴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균형이 아니라, 그저 ‘정지 상태’였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던 게 아니라, 아예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8년 전부터는 달랐다. 퇴직을 준비하며 새벽 4시 반에 일어나는 삶이 시작됐다. 출근 전까지는 책을 읽고 글을 썼다. 퇴근 후에는 강의 자료를 만들었다. 하루는 24시간인데, 내 하루는 늘 모자랐다. 술을 끊고, 야식을 끊고, 잠도 줄였다. 그 대신 얻은 건 ‘몰입의 근육’이었다.

화면 캡처 2025-11-12 065226.png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단단했다. 주변에서는 “너무 극단적이다”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적이 있으니 불균형이 아니었다. 그건 의식적인 기울임이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때로는 한쪽으로 기울어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다.


워라밸을 완벽히 맞춘 사람은 세상에 없다. 다만 그 시점의 ‘우선순위’를 아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나에게 8년은 ‘일의 시기’였다. 하지만 그 시기가 있었기에 지금의 ‘삶의 시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삶이란 결국, 한쪽으로 치우쳤다가 다시 돌아오는 반복의 예술이다.


그때를 돌이켜 보면, 퇴근 후의 나를 지키기 위해 술 대신 노트를 택했고, 사교 대신 글을 택했다. 누군가와 웃으며 보냈을 시간을 나와 마주하며 버텼다. 그게 외로움이 아니라 성장의 고독이었다.


요즘 워라밸을 말할 때 대부분 ‘시간의 균형’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균형의 본질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시간의 질이다. 3시간 회식보다 30분의 몰입이 더 가치 있고, 10시간 야근보다 1시간의 성찰이 더 강력하다. 삶의 밀도를 높이는 게 진짜 균형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심리적 복원력’이라 부른다. 즉, 일에서 소모된 에너지를 삶에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퇴근 후에도 회사 생각만 한다면 워라밸이 아니라 워크-워크다. 균형은 휴식의 기술이며, 자기 회복의 습관이다.


많은 30대 직장인이 말한다. “지금은 버티는 시기다.” 그 말엔 현실이 녹아 있다. 하지만 그 ‘버팀’이 너무 길어지면 버티는 게 일상이 되고, 사는 게 부업이 된다. 나는 그 함정에 오래 빠져 있었다. 시간은 있었지만, 방향이 없었다. 그 시절 내 인생은 마치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한 인생이었다. 흘러갔지만, 남은 건 없었다.


삶의 균형은 수학이 아니다. 무게가 같다고 균형이 맞는 게 아니다. 오히려 불균형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한쪽이 무거우면 그만큼 다른 쪽이 단단해진다. 가끔은 일에 올인해야 할 때가 있고, 가끔은 삶을 더 사랑해야 할 때가 있다. 문제는 어느 쪽으로 기울든 왜 그렇게 기울었는지를 알고 있는가다.


워라밸은 정답이 아니라 나만의 공식이다. 남이 정한 저울 위에 내 인생을 올려두지 말자. 내가 만든 저울 위에서 오늘의 나를, 내일의 나를 천천히 재보면 된다.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흔들려야 한다. 멈추면 넘어진다. 우리 삶도 같다. 하루하루 흔들리면서 중심을 잡는 게 인생의 기술이다. 오늘은 일에 무게를 두고, 내일은 삶에 무게를 줘도 된다. 흔들리되, 쓰러지지 않는 것. 그게 진짜 균형이고, 우리가 말하는 워라밸이다.



https://youtu.be/OSMPX2nFD9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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