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시대 인류는 맹수와 사투를 벌이며 살았다. 뇌는 위험을 감지하면 코르티솔을 분비하고, 투쟁(fight) 또는 도피(flight)를 선택하도록 만든다. 문명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호랑이를 피해 다니지 않는다.
문제는 맹수가 사라졌을 뿐, 위협의 주체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인간관계라는 이름으로 모습만 바꿨다. 회사라는 정글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건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 메일, 보고서, 따가운 한마디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위협(social threat)’이라고 부른다. 우리 뇌는 아직도 “사람의 눈초리”를 “맹수의 이빨”과 같은 강도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상사의 호통에도, 동료의 뒷말에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가슴이 뛰고, 손에 땀이 나고,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반대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한다. 이것 역시 원시시대의 유산이다.
초년생 시절 나는 거절도 못하고 쓴소리도 못했다. 흐리멍덩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 여겼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는 나를 만만하게 봤고 누군가는 나를 함부로 대했다.
이른바 “착한 사람 증후군”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착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경계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일 때가 많다. 나는 상대에게 친절했지만, 정작 나에게는 잔혹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관계의 초반에 설정된 규칙이 가장 오래간다”라고 말한다. 처음에 흐리멍덩하면 상대는 내 경계를 ‘여기까지’라고 오해한다. 그리고 그 규칙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
회사란 무엇인가? 상행위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 인간의 가치가 ‘성과’라는 수치로 환산되는 곳. 성과 수치가 곧 경쟁력이고 경쟁력이 곧 서열을 만든다. 그러니 회사는 구조적으로 친밀하기 힘든 시스템이다. 겉으로는 ‘우리는 팀입니다’라고 말해도 속으로는 ‘너보다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 우리 모두는 조직 안에서 경쟁자다.
사회 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인간이 깊게 유대할 수 있는 인원은 최대 150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회사 안에는 150명을 훌쩍 넘는 사람이 존재한다. 즉, 회사에서 친밀한 관계를 원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설계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너무 상처받지 말자. 회사에서 친해지기 어려운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인간 구조의 문제다.
20년 동안 아홉 번 회사를 옮겼다. 일만 시키는 회사, 월급을 밀리는 회사, 윗사람의 폭력을 묵인하는 회사,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회사… 종류도 참 다양했다. 물론 인간적으로 대해준 곳도 있었지만 그 비율은 크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나는 하나의 전략을 세웠다. 바로 거리 두기.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서적 완충(EI Buffering)”이라고 부른다. 너무 가까우면 상처도 쉽게 받는다. 너무 멀면 일 자체가 어려워진다. 적당한 거리에서 관계를 유지하면 상처받을 가능성도 줄고, 필요할 때 도피 전략도 사용할 수 있다. 나는 말을 먼저 걸지 않았고 먼저 나서서 일하지도 않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 것을 여러 번 봤기 때문이다.
누구도 사람과 떨어져 살 수 없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가까이 갈 필요도 없다. 거리를 잘 두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에너지를 덜 소모한다. 진화심리학에서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생존 확률을 높인다”라고 말한다. 동물 세계에서도 무리에서 너무 떨어지면 잡아먹히지만 너무 붙어도 힘 겨루기의 대상이 된다.
적정 거리에서 움직이는 동물이 제일 오래 산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불필요하게 가까우면 오해가 생기고 너무 멀면 소외된다. 그러니 필요한 만큼만 가까워지고 지켜야 할 만큼만 멀어지면 된다.
인간관계의 가장 큰 착각이 있다. “상대가 변하기를 기대하는 것.” 그러나 행동심리학의 결론은 명확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특히 직장에서 만난 사람은 가치를 공유한 것도 아니고, 서로의 성향을 알기도 어렵다.
그러니 변화는 상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다. 경계를 지키고, 거리를 설정하고, 상황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하는 것. 이게 진짜 생존 전략이다.
원시 인류는 맹수를 만나면 둘 중 하나였다.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현대인은 인간관계라는 맹수를 만난다. 여기서도 선택지는 두 가지다.
직접 부딪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 그러나 직장에서의 투쟁은 위험이 크다. 힘이 비슷해야 싸움이 되지만 서열 구조에서 실력과 힘은 고르게 분배되지 않는다.
물리적 도피가 아니라 감정적·관계적 거리 두기다. 막말로 잡아먹힐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다. 도피는 비겁함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심리학에서도 “회피는 때때로 최고의 방어력”이라고 말한다.
직장 관계는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일이 거의 없다. 서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내가 원치 않는 상황에 휘말리고,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일에 책임을 떠안는다.
이때 필요한 건 완벽한 관계가 아니라 건강한 거리다. 가깝지 않아서 편하고, 멀지 않아서 일하기도 편한 거리. 이 거리가 확보되면 투쟁할지, 도피할지 선택할 여유가 생긴다. 그 여유가 바로 ‘생존력’이다.
결국 회사 안 인간관계는 내가 조절하지 않으면 상대가 조절한다. 거리를 두면 상처받을 일이 줄고 거리 없이 붙으면 불필요한 스트레스가 늘어난다. 그러니 관계의 거리에서 우리는 늘 나를 먼저 지켜야 한다. 필요한 만큼만 가까워지고 지켜야 할 만큼만 멀어지자. 그게 살아남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