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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도 유통기한이 있다

by 김형준

한참 술 마실 때는 주량 따위 정해놓고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다. “오늘은 딱 두 병만” 같은 말은 시작 전에만 유효했다. 마시다 보면 어느새 병이 탑처럼 쌓였다. 한 병씩 시키는 이유도 지금 생각해 보면 일종의 도전 정신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이기나, 술이 이기나. 어제의 나를 이기겠다는 이상한 승부욕으로 한 잔씩 더 부었다.


흥미로운 장면은 따로 있다.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무한리필 술집에 가면 오히려 전투력이 떨어졌다. 언제든 더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애써 마실 이유가 사라진다. 뇌과학에서 말하는 ‘희소성 효과’가 여기서도 작동한다. 사람은 부족할수록 더 집착하고, 많을수록 흥미를 잃는다. 늘 술이 채워져 있으니, 술에 대한 애착도, 그날에 대한 집중도 줄어든다. 결국 의욕 빠진 술자리에, 애매한 분위기만 남는다.


퇴근 무렵 전화기를 꺼낸다. 약속 없는 친구를 고르는 속도는 업무 메일보다 빠르다. 별것 아닌 이유에도 술자리는 금방 성사된다. “오늘은 네가 힘들어 보인다”, “나도 뭐 좀 있었다” 이렇게 서로의 핑계를 빌려 마음껏 알코올을 붓는다. 2차는 기본, 3차는 예의, 4차는 옵션. 누가 정했는지도 모를 규칙이 의외로 잘 지켜진다. 한밤이 지나갈 즈음에야 내일 출근이 스쳐 지나간다. 그제야 라면 한 그릇으로 마무리하고 각자 집으로 흩어진다.


그 시절 친구는 무한리필 맥주 같은 존재였다. 부르면 언제든 달려와 주는 사람. 돈도, 시간도, 체면도 계산하지 않았다. 어떤 심리학자는 말한다.

“젊을 때의 우정은 조건이 아니라 온도에서 시작된다.”

그 말대로였다. 부모보다 친구에게 더 마음을 열었고 연애보다 친구와의 술자리를 더 우선순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자존심은 동전 뒤집듯 쉽게 내려놓았다. 서로에게 쓴소리를 해도 상처가 아니라 성장 통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런데 인생이 늘 술집처럼 머무르진 않는다. 연인을 만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운다. 어느새 40대. 두 발목에는 ‘가정’과 ‘직장’이라는 책임이 차갑게 채워진다. 이때부터 술친구의 구성이 바뀐다. 친구 이름 대신 상사 이름, 거래처 이름이 자리를 채운다. 술잔은 오가는데, 정은 오가지 않는다. 눈치를 보고 잔을 채우고, 분위기를 맞추려 억지웃음을 만든다.


사회 심리학에는 ‘사회적 교환 이론’이라는 개념이 있다. 관계는 결국 손익 계산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직장 술자리는 거의 항상 손익 계산 위에서 돌아간다. 상대는 내 인생을 함께할 사람이라기보다 ‘업무의 연장선’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술자리가 끝날 때마다 배는 부른데 마음은 공허하다. 그때 문득, 예전 친구들이 그리워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는 흔히 친구를 “늘 그 자리에 있을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인생은 항구가 아니라 바다에 가깝다.

정박해 있을 땐 자주 만나지만 돛을 달고 각자 항로에 오르면 서로가 어느 바다를 떠다니는지도 모른다. 사회학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관계의 수’보다 ‘관계의 질’을 중시하게 된다고 한다. 소위 ‘사회적 선택성 이론’이다.

자연스럽게 친구 수는 줄고, 남는 사람만 남게 된다.


가끔 운 좋게 예전 친구들과 다시 모인다. 달라진 외모, 말투, 분위기. 반가움과 어색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한때는 서로의 비밀까지 꿰고 살았는데 이젠 서로의 직함과 자녀 수부터 확인한다. 술이 몇 잔 들어간 뒤에야 겨우 예전의 농담과 웃음이 돌아온다. 하지만 대화의 온도는 예전 같지 않다. 각자 등에 짊어진 책임의 무게가 말줄임표처럼 사이사이를 눌러앉는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고 했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같은 친구라도, 같은 우리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나도 변했고, 그들도 변했다. “지금의 나는 내가 지나온 선택들의 결과다”라는 말처럼 각자 그간의 선택이 쌓여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넌 왜 예전 같지 않냐”라고 묻는 건 상대에게 잔인한 질문이다. 사실은 나도 예전 같지 않으니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사실만 서로 인정해 줄 수 있다면, 그게 어른의 우정 아닐까 싶다.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친밀한 관계 몇 명만 잘 유지해도 스트레스가 줄고 회복 탄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우정의 ‘숫자’보다 ‘깊이’가 마음 건강을 좌우한다는 뜻이다. 심리학자들도 말한다. 평생 곁에 둘 수 있는 친구 둘셋이면 이미 삶으로는 충분히 부자라고.


술자리와 인생은 닮은 구석이 있다. 술병이 비면 새 술로 채운다. 인생에서도 어떤 인연은 비워지고 새로운 인연이 그 자리를 채운다. 오늘의 나와 맞는 사람, 지금의 가치관과 닿는 사람을 새로 만나게 된다.


오래 따놓은 술은 맛이 변한다. 아무리 비싼 술도 오래 공기와 닿아 있으면 탁해진다. 오래된 관계도 비슷하다.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맛이 변한다. 그렇다고 억지로 다 마실 필요는 없다. 입에 맞지 않으면 내려놓으면 된다.


중요한 건, 모든 관계를 붙잡으려 애쓰느라 정작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평생 곁에 둘 친구 셋을 지키고, 그 외의 인연은 흘러가는 대로 보내 줄 수 있는 태도. 언제든 떠나보낼 수 있을 만큼, 떠나보내도 미워하지 않을 만큼, 서로의 삶을 응원해 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근사한 우정 아닐까.


결국 인생은 무한리필 술집이 아니라 잔마다 맛이 다른 시음회에 가깝다. 모든 잔을 비울 필요는 없다. 지금 내 삶에 맞는 잔을, 내 속도를 해치지 않는 정도로만 즐기면 된다. 그렇게 오늘 마주 앉은 한 사람, 지금 내 곁에 있는 몇 사람에게 조금 더 진심을 건넬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잘 살고 있는 거다.




https://youtu.be/izsj_abnP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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