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 남은 하루의 시작

#13. 쓸수록 쓸모 있는 단어

by 김형준

퇴근

: 남은 하루의 시작


출근하며 퇴근을 생각했었다. 십 수년 째 같은 일을 반복하며 매너리즘에 빠져있을 때였다. 직장은 생계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일을 통해 의미도 찾지 못했고, 이루고 싶은 것도 없었다.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배우고 싶은 열의도 없었다. 생계만 보장된다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생계가 보장 안돼 그만두지 못하고 있었다.

삶의 의욕이 없어도 하루는 일찍 시작했다. 어느 직장을 가도 출근은 늘 제일 먼저 했다. 출근길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게 싫었다. 조금만 일찍 나서면 몸이라도 편할 수 있었다. 일찍 출근한다고 월급을 더 준다면 새벽같이 나올 수도 있었다. 일찍 오는 만큼 여유는 있었다. 여유가 있어도 특별히 하는 건 없었다. 차 마시고 검색 좀 하다 보면 하나 둘 출근한다. 9시면 업무 모드로 들어간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같은 일을 반복한다. 심심할 때쯤 사건 사고가 터진다. 잠시 바빠진다. 세상에 안 되는 일 없다고 했다. 아무리 지랄 같은 일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얼레벌레 마무리하고 나면 또 같은 일의 반복으로 이어진다.

언제까지 이렇게 반복하며 살아야 할지 생각해봤다. 조금씩 은퇴를 걱정하면서도 별다른 대안은 없었다. 친구 중 조금 일찍 자신의 일을 시작한 걸 보면 부럽기도 했다. 물론 그들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 내가 그 상황이 안돼 보니 다 이해하진 못한다. 적어도 월급쟁이, 은퇴의 고민은 덜은 게 부러울 뿐이었다. 마냥 부러워하고 있을 수 없었다. 더 늦기 전에 결단이 필요했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지금 일에 더 집중해 최대한 오래 몸담고 있을 건지, 아니면 자영업이든 내 일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를 선택했다. 직장을 오래 다닐 자신은 없었다. 맞지 않은 옷을 더 이상 입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지 생각했다.

그즈음 공인중개사를 하는 지인으로부터 호프집 인수 제안을 받았다. 자리가 괜찮아 생각 있으면 알아보라고 했다. 아내와 상의도 하고 지인들에게 상담도 받아봤다. 한 달 정도 퇴근 후 찾아가 손님이 어느 정도 있는지도 조사했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봤지만 시기상 유리하지 않았다. 결국 인수는 없던 일로 했다. 의욕적으로 달려들었던 일이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자 또 다른 회의감에 빠졌다. 암울한 직장 생활이 더 암울해졌다.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그때 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말 계획 없이 막연히 읽기 시작했다. 출근하며 읽고, 퇴근하며 읽고, 집에서 읽고, 차 안에서 듣기를 이어갔다. 책을 읽으니 하고 싶은 게 생겼다. 부동산을 공부하고, 글쓰기를 배우고, 독서 모임을 다녔다.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고 강의할 기회도 얻게 되었다. 책을 읽을 수 있어 출근이 즐거웠다. 일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다. 책을 읽을 수 있어 외근이 즐거웠다. 배우고 싶은 게 생겨 퇴근이 기다려졌다. 배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또 책을 읽을 수 있어 즐거웠다. 책을 읽는 시간은 즐거웠다. 그 즐거움 덕분에 3년을 매일같이 읽고 있다.


책을 통해 새로운 걸 배우고, 사람을 만나고, 강의를 할 수 있었던 건 퇴근 후 시간이 있어 가능했다. 퇴근은 일이 끝난 남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 아침을 준비하듯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퇴근을 기다렸다. 퇴근 후 시간은 온전히 나에게 집중했다. 술자리도 끊고, 야근도 줄였다. 야근을 줄이기 위해 일과 시간의 집중도를 높였다.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노력했다. 퇴근 후 시간을 위해 직장에 더 충실한 건 나 자신에겐 일타쌍피의 효과였다. 술자리를 끊으며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술자리 수도 없이 앉아있어 봤지만 대부분 푸념만 늘어놓을 뿐 새로운 걸 배울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무언가 집중해야 할 땐 불필요한 건 과감히 제외시킬 수 있어야 했다. 솔직히 초반에 힘들었다. 술자리를 통해 유대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건 나이들 수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어쩌면 사람이 더 큰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봤다. 서로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면 상대를 위해 어느 정도 희생은 감수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그걸 이해해주지 못한다면 과감히 끊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퇴근 후 술자리를 멀리한 지 3년이 되어 간다. 지금은 나 자신도 편해졌다. 의무감에 불려 다닐 일도, 억지로 부르는 사람도 없다. 사람이 그립지 않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이대로의 시간이 더 좋다. 오히려 매일 읽는 책을 통해 세상과 더 다양하게 소통하는 느낌이다. 물론 인간관계를 절대적 가치로 비교할 순 없겠지만 어디에 더 가치를 둘 지는 본인 스스로 선택해야 하고, 나는 책과 배움을 선택했다.

3년 동안 출근 전과 퇴근 후 시간은 정해진 일과로 채워져 왔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그리고 틈틈이 강의를 듣고 사람을 만난다. 나는 돈을 많이 버는 작가가 되고 싶다. 글로 돈을 벌 수 있다면 직장도 기꺼이 오래 다닐 자신 있다. 직장만큼 안정적인 수업원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없다. 쫓겨나지 않는다면 오래 붙어있고 싶다. 가끔 하는 기분이 좋아지는 상상이 있다. 글로 버는 수입이 월급보다 월등히 앞지르는 거다. 그때 미소 가득 발걸음 가볍게 출근하는 내 모습이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오늘도 이 순간 이 글을 쓰고 있다. 퇴근 후 시작된 남은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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