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택배의 기다림보다
조금 더 설레며 살아가기

#18. 쓸수록 쓸모 있는 단어

by 김형준

며칠 전 아내가 담근 겉절이와 남겨 둔 치킨을 안주로 아내와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때마침 티브 프로그램에서 임지호 셰프가 김치를 담근 뒤 몇 가지 반찬을 만드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분이 요리하는 모습은 거침없습니다. 계량도 필요 없고 칼질도 필요 없습니다. 손으로 뜯고 자르고 무심하게 툭툭 덜어 넣으며 조물 조물 만들어 냈습니다. 직접 맛을 본 패널의 얼굴을 보니 그 맛이 더 궁금했습니다. 감히 상상이 안 갔습니다. 아무리 상상해도 그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대신 아내가 담근 겉절이를 입 안에 넣고 그 맛을 음미해 봅니다. 화면에 보이는 맛을 알 수 없지만 곁에 있는 아내의 손맛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화면에 나와도 늦은 밤 기꺼이 함께 소주잔을 기울여 주는 건 아내였습니다. 근사한 안주는 없어도 언제든 부담 없이 한 잔 할 수 있는 상대는 아내뿐입니다. 별다른 반찬 없어도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주고 함께 밥을 먹어주는 것도 아내입니다. 청소와 설거지를 안 한다고 잔소리하는 것도 아내고, 투덜대고 하고 나면 감사하단 말을 빼먹지 않는 것도 아내입니다. 남은 재료로 얼렁뚱땅 정체모를 음식을 만들어내도 감사히 먹어 주는 것도 아내입니다. 스트레스받고 지칠 때면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주는 것도 아내입니다. 그런 아내와 12년째 살아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열두 번째 결혼기념일입니다. 10년째 되던 해부터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다음 해 결혼기념일을 기약할 수 없을 것 같은 시간도 있었습니다. 10년을 쌓아 두었던 감정이 한 번에 터지며 서로를 힘들게 했습니다. 감정이 앞선 싸움엔 상대방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쓴 말도 거침없이 내뱉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간 쓴 말은 아내도 다치지지만 내게도 상처를 냅니다. 상처가 나도 당장은 모릅니다. 이성의 끈을 놓은 이상 상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 바탕 쏟아내고 흥분을 가라앉히며 비로소 서로를 보게 됩니다. 그때 보이는 건 누더기 된 상처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성이 되돌아오니 무슨 짓을 했는지 보였습니다. 그대 번뜩 스치는 게 있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아내와 헤어지면 잘 살 수 있을까?'

아니었습니다. 이건 아니라는 본능적인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마음에 담아 둔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며칠 이어진 대화로 벌어진 틈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 벌어진 틈을 다시 메우기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불만은 이야기했습니다. 바라는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과거보다 지금을 이야기했습니다. 미래도 이야기했습니다. 서로 어제의 모습보다 내일의 모습을 기대하기로 했습니다. 끝일 것 같던 순간에 결국 아내의 이해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시작하며 아내에게 달라진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하며 달라져 가는 저를 아내는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이해시키지 못한 제 잘못이 더 컸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설명을 듣기보다 스스로 부딪히기로 한 것 같았습니다. 내가 왜 책을 읽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같은 책을 읽으며 한 발씩 다가와 주었습니다. 같은 책을 읽으며 제 행동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책을 읽는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을 열어준 아내에게 저도 더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읽은 책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미처 몰랐던 부분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놓친 부분을 내가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자연스레 대화도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먼저 대화를 시작해 주는 아내가 고마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책 본다고 눈치 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이들이 조금씩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수시로 책을 보는 엄마 아빠 때문에 티브이도 눈치 보며 보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아이들 선택에 맡기고 있습니다. 한 가지 바람은 아이들도 책 읽는 엄마 아빠 모습에 영향을 받았으면 합니다. 강제가 아닌 자율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아이들 학년이 올라갈수록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아집니다. 경제적인 부담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돈이 행복의 제1조 건은 아니라 믿습니다. 하지만 돈이 부족하면 마음의 여유 또한 쪼그라들 겁니다. 반대로 돈이 많아도 마음의 여유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는 서로의 대한 믿음이 먼저라 생각합니다. 많이 대화하고 감정을 공유하고 유대감을 쌓으며 만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돈으로 인한 상처보다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감정 공유를 할 수 없다는 게 더 큰 상처가 될 겁니다. 노후가 보장되지도, 만족스러울 만큼 벌어주지도 못합니다. 언제쯤 꿈을 이룰지 장담하지도 못합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힘든 시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경제적으로든 아이들 문제로든 분명 더 힘든 시간이 있을 겁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꼭 지켜주고 싶습니다.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내가 기대는 유일한 사람이 아내이듯, 아내도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저였으면 합니다. 이번 주 혼자 휴가를 보내 아쉽지만 적어도 아내에겐 마음 편한 한 주를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고 큰딸 점심 챙겨주러 가야겠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행동 : 불안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