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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ul 13. 2021

살림은 함께 하는 겁니다

밥상머리에서 배운 것들

27년 지기 친구 세 명에게 책을 사준 적 있었다. 엠제이 드마코의 ≪부의 추월차선≫이었다. 이 책을 읽고 돈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만 아는 게 미안할 정도로 좋은 내용이라 생각해 직접 사서 선물했다. 세 친구가 꼭 읽어보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함께 담아 건넸다. 몇 개월 뒤 다시 모인 자리에서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선물 한 책 읽어봤냐?”

“미안! 난 손도 못 댔다.”

“나도 미안! 몇 장 읽다가 접었다.”

“그래. 못 읽었다니 어쩔 수 없지. 대신 라면 먹을 때 냄비 받침으로만 사용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정말 미안하다. 내가 그만 냄비 받침으로 사용하고 말았다.”

“그랬구나.......”

솔직히 세 친구에게 실망했다. 내 진심을 이해받지 못한 것 같아 속상했다. 하지만 근사하게 밥상을 차려줄 수는 있지만 떠먹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배고픈 사람이 스스로 숟가락을 들어야 배도 채울 수 있다. 다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걸 그때 또 한 번 깨달았다.     


‘나는 자기 계발을 할 테니 당신은 살림을 책임져 줘.’

‘나는 자기 전까지 책을 읽을 테니 당신은 아이들과 놀아줘.’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했었다. 불과 3년 전이었다. 책을 읽고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고, 그와 관련된 자기 계발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아내와 상의도 없이 스스로 결정했다. 내가 결정했으니 당신은 따라줬으면 좋겠다는 식이었다.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강의와 사람을 찾아다녔다. 지금 이런 노력들은 온전히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나에게만 세뇌시키고 있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면 아내도 당연히 따라줄 거라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노력이 소중했고, 내 시간이 낭비되는 게 아까웠다. 내 노력을, 내 시간을 적어도 아내만큼은 이해하고 지켜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다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걸 잊고 있었다.       


어느 조직이나 위계질서가 있다. 책임자가 있고 지시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 이런 질서는 나이나 경력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더 경험이 많은 사람이 책임을 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지시를 받으며 배우게 된다. 그래야 조직이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유일한 곳이 가정이라 생각한다. 가정을 꾸린 이상 공동의 책임이다. 둘 중 일방적으로 책임을 지거나 지시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결혼부터 아이를 낳고 키우는 모든 과정이 결코 혼자되는 건 없다. 서로 의견을 묻고 합의과정을 거치며 결과로써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내 시간이 소중하면, 아내의 시간도 소중하다. 내 몸이 피곤하면, 아내의 몸도 피곤하다. 내가 책을 읽고 싶으면, 아내도 책을 읽고 싶어 한다. 내가 쉬고 싶으면 당연히 아내도 쉬고 싶다. 둘 중 한 사람이 하고 싶을 걸 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사람의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희생을 강요할 수도 없는 게 가정이다. 서로가 바라는 점을 맞춰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내의 불만이 커질 즘 그동안 내가 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해봤다. 퇴근 후 책 읽을 시간이 있었던 던 아내가 살림을 해줬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수업을 듣고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아내의 역할을 충실히 해줬기 때문이다. 아내의 역할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나는 내 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사람, 아내는 그런 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희생해도 되는 사람. 그동안의 내 시간은, 어쩌면 아내의 시간을 훔쳤기에 누릴 수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아내의 희생이 당연하게 아니라는 것을.      


“고기는 내가 구울게.”

“당연하지. 고기 굽는 건 당신이 더 잘하니까.”

“인정하는 거야?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고기 굽는 건 자신 있다.”

“대신 나는 반찬 만들잖아. 당신이 만든 멸치 볶음이 돌덩어리가 된 거 알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먼저 퇴근한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으면 뒤에 들어온 나도 옷만 갈아입고 아내 옆에 선다. 새로 반찬을 만들지 않을 땐 손 갈 일이 없다. 아내가 미리 만들어 놓은 반찬을 꺼내 접시에 담는다. 나는 밥을 푸고, 국을 담아낸다. 다 먹고 나면 설거지는 내가 한다. 설거지하는 동안 아내가 청소기를 돌린다. 반대로 아내가 설거지를 하면 내가 청소기를 돌린다. 내가 마른빨래를 걷어 정리하면, 아내는 세탁을 마친 빨래를 넌다. 이렇게 저녁을 차리고, 먹고, 뒷정리까지 끝내는 데 한 시간도 안 걸린다. 보통 9시부터 각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때부터 나는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고, 아내도 책을 읽거나 마음 편히 TV를 보기도 한다. 이렇게 손발을 맞춘 건 1년 전부터였다. 긴 시간 대화하며 서로의 생각을 좁힐 수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 아내가 바라는 걸 꺼내놓고 맞추기 시작했다. 하나씩 맞춘 결과가 지금의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저녁 각자 맡은 역할을 해냄으로써 서로의 시간을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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