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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ul 14. 2021

맨 몸으로 막아낸 아침 밥상

밥상머리에서 배운 것들

6시 반까지 현장 사무실에 도착하려면 5시 50분에는 출발한다. 새벽이라 차는 안 막힌다. 교차로 신호만 잘 받으면 30분 도 안 걸리는 경우도 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를 올라타니 전화가 걸려온다. 


“철근 싣고 가는 기사입니다. 위치가 어디쯤이죠?”

“약도 안 받으셨나요? 담당자분한테 약도 보내드렸는데요.”

“글쎄요. 연락처랑 대충 어디라고만 알려주던데요.”


출근길에 걸려 온 전화는 양호한 편이다. 심한 경우 잠이 깨기 전 몇 분간의 꿀잠을 깨우는 전화도 있었다. 화물을 실은 트럭은 출근 시간 서울 시내 운행을 제한하는 규정으로 인해 새벽에 운행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담당자가 약도를 전달하지 않은 이번 같은 경우처럼 새벽에도 전화가 걸려오는 경우가 흔했다.  


“기사님 6호선 수색역 3번 출구 앞에 오시면 현장이 바로 보여요. 거기서도 안 보이면 다시 전화 주세요.”


제시간에 사무실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화물 기사분 전화가 걸려온다. 기사분이 전화하는 경우는 길을 못 찾거나 도착했으니 물건을 내려달라는 두 가지 경우뿐이다. 하루에도 수십 종의 자재가 들어오는 현장이다 보니 종류와 거래처가 다양하다. 7시 반 작업 시작에 맞춰 그날 필요한 자재가 도착해야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다. 매일 아침 일종의 교통정리를 하다 보면 아침밥을 놓치기 일쑤다. 심하면 밥숟가락을 뜨는 찰나 걸려온 전화로 뛰쳐나가야 하기도 한다. 이런 나를 보는 선임들은 한 마디씩 거든다. 


“김 대리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기사들 좀 기다리라고 해.”

“그러게요. 다 제 맘 같진 않은가 봐요. 다들 바쁘다고만 하고 짜증만 내니 그 꼴 보기 싫어서라도 후딱 해치우는 게 속 편합니다.”


일에 치여, 사람에 치여, 시간에 치여 내 밥그릇을 빼앗기는 경우는 직장인이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 중 하나다. 하지만 내 자식을 위해 차려 놓은 밥상을 누군가 빼앗으려 한다면 가만히 있을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까? 나조차도 가만히 두고 못 볼 것 같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나에게 일어났었다.     


천장 안에 쥐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아침인 걸 알았다. 창문은 있지만, 빛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비가 오면 곳곳에 스며든 빗물 얼룩이 짙어졌다. 겨울에 화장실을 가려면 외투를 입어야 했고, 여름엔 쪼그려 앉아 있으면 구더기가 다리를 기어오를까 봐 엉거주춤 볼일을 봐야 했다. 2년 넘게 그런 집에 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사춘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반항은 하지 않았지만 입을 닫고 있었다. 아침밥을 차려주면 대충 먹고 빨리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날도 똑같은 마음으로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찾아올 손님 없을 이른 시간이었지만 대문이 요란하게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빨간 모자를 쓴 덩치가 큰 어른 몇 명이 마루 앞에 섰다. 한 손에는 곡괭이, 해머, 삽을 다른 한 손에는 빈 포대를 쥘 수 있는 최대한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아주머니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연락 못 받았어요. 오늘 철거하러 온다고 했잖아요.”

“철거는 무슨 철거. 언제 우리가 나간다고 했어. 너희들이 일방적으로 철거하러 온 거잖아. 난 못 나가니까 이 집 부수려면 나 먼저 죽이든지 살리든지 해야 할 거야.”

“이 아줌마 막무가내네. 우리는 정당하게 지시받고 일하는 겁니다. 이러시면 곤란하죠.”

“곤란하긴 뭐가 곤란해. 이 새벽에 아이들 밥 먹는데 쳐들어온 너희들이 더 경우가 없는 거지.”

“아! 환장하겠네. 일을 복잡하게 만드시네. 저희는 지시받은 대로 할 테니 방에 있든지 나가든지 알아서 하세요.”


남자들은 신발은 신은 채로 마루 위로 올라섰다. 어머니는 더 격렬하게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장사를 오래 한 탓에 경위 없는 손님들과 실랑이하는 건 자주 봤었다. 하지만 이날의 어머니는 보통의 실랑이가 아니었다. 마치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맹수에게서 새끼를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막아선 어미 얼룩말 같았다. 남자들도 워낙 완강하게 막아선 어머니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더는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밥보다 어머니 걱정보다 창피한 게 먼저였다. 실랑이를 벌이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가방을 짚어 들고 집을 나왔다. 어머니는 일어나는 내 팔을 잡으며 끝까지 먹고 가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마치 남자들에게 밥상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손도 뿌리치고 집을 나왔다. 그 뒤 상황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집은 그대로 있었다. 그날 이후 남자들은 다시 오지 않았다. 우리도 한 달 정도 뒤 다른 집으로 이사 갔다.     


성인이 되기까지 먹고사는 걱정은 부모님의 몫이었다. 그 덕분에 안락한 집에서 하루 세 끼를 먹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들처럼 좋은 환경,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고 자라진 못했지만 부모님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우리 형제를 키우셨다. 성인이 되어 직장을 다니며 내 몸 하나 제대로 먹기 살기 위해 일과 사람에 치이며 끼니를 놓치기도 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아이들 밥은 무슨 수가 있어도 챙기려고 한다. 그나마 지금은 햇볕이 잘 드는 남향집에 화장실 두 개 주방과 거실을 있는 안락한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아마 내 부모님이 그때 우리를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굳건히 지켜내셨기에 지금의 환경을 갖게 될 만큼의 바른 삶을 살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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