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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ul 12. 2021

미역국과 냉면

밥상머리에서 배운 것들

여름 방학이 싫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은 늘 여름 방학과 겹쳤다. 부모님은 생일을 달력의 작은 글씨로 지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도 음력 양력을 헷갈려했다. 매년 어머니가 날짜를 계산해 달력에 표시해 주셨다. 그렇게 표시된 생일은 언제나 8월 초에 걸려있었다. 생일이 학기 중에 있는 친구들은 다른 친구들의 축하를 받는다. 형편이 괜찮은 친구는 생일 파티도 했다. 생일 파티를 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선물을 받고 싶어서다. 가까운 친구의 생일을 알게 되면 용돈을 모아서라도 선물을 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 게 예의라고 배웠다. 하지만 학기 중 여러 친구의 생일을 챙겼지만, 정작 내 생일은 날짜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언제나 여름 방학의 한가운데 있으니 축하받을 기회가 없었다. 부모님께 따지기도 했었다. 왜 큰 글씨가 아닌 작은 글씨로 지내야 하는지 물어도 원래부터 그래 왔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나마 학교 다닐 때는 부모님이 이런 내 사정을 짐작하셨는지 생일상은 꼭 잊지 않고 차려주셨다. 평소 먹던 반찬에 소불고기나 잡채, 두부조림 등이 더해졌다. 미역국은 특별히 소고기로 국물을 우렸다. 밥은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의미로 찹쌀, 팥, 쌀이 3:1:1 비율로 섞은 찰밥이었다. 찰진 밥을 밥그릇이 작아 보일만큼 꾹꾹 눌러 담아내셨다.

“생일상 받으면 밥이랑 국은 남기면 안 돼. 다 먹어야 잘 산다고 했어. 다 못 먹으면 남겨 놨다가 점심에 더 담아서 마저 먹어.” 

툴툴거리긴 했지만 기어코 한 그릇 다 비운 뒤 일어났다. 일어나는 손에 늘 이 만 원을 쥐어 주셨다. 

“낮엔 더우니까 다른 거 먹지 말고 시원한 물냉면 한 그릇 먹어. 냉면을 먹어야 질긴 면처럼 오래 산다고 했어.”

어머니의 생일상과 용돈은 친구들에게 축하받지 못했던 서운함을 대신 채워줬다.      


26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창업 멤버로 4년 반을 함께 했다. 20대를 오롯이 바쳤지만 남은 건 빚뿐이었다. 창업 초기 몇 달은 월급을 받았다. 회사 운영이 뜻대로 안 되면서 월급도 없었다. 그만두려고 다른 일을 알아봐도 나를 받아 줄 만한 곳은 없었다. 암울한 시기를 보냈지만 8월이면 어김없이 생일은 돌아왔다. 회사에선 생일을 챙겨 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내 입으로 꺼내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였다. 집에선 독립을 했던 때라 어머니의 생일상을 받진 못했다. 대신 점심쯤 전화가 걸려온다.

“생일인데 미역국은 먹었니?”

“아니요. 바빠서 간단히 먹었어요.”

바쁘지 않았다.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었을 때였다. 말이라도 바쁘다고 해야 덜 걱정할 것 같았다.

“바빠도 밥은 잘 챙겨 먹어라. 점심엔 시원하게 냉면 한 그릇 먹어. 용돈 없으면 보내줄까?”

“그 정도는 있어요. 걱정 마세요.”

아니 냉면 한 그릇 사 먹을 돈도 없었다. 돈이 있었어도 혼자 먹을 용기는 없었다. 만약 냉면을 먹으러 가려면 생일 인 걸 내 입으로 말하고 내 돈으로 계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럴 돈이 없을 때라 생일은 조용히 지나갔다. 다행인 건, 직장은 암울했지만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은 생일을 잊지 않고 챙겨줬다. 매년은 아이였지만 어쩌다 한 번 생일을 챙겨줄 때는 최고의 날이었다. 선물로 몇만 원 티 한 장은 명품 못지않았고, 삼겹살에 소주지만 고급 레스토랑이 부럽지 않았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생일의 의미가 달라졌다. 생일이라고 해서 당사자인 내가 즐겁기보다 두 딸에게 더 의미 있는 날이 되었다. 두 아이는 자라며 생일의 의미를 배우게 되었다. 자신들에게도 생일이 있고, 생일은 부모님에게 선물을 받는 날이고, 선물을 받기 위해 자신들도 부모님의 생일을 챙겨야 한다는 논리를 배웠다. 물론 선물보다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마음이 먼저 인건 안다. 아직은 엄마, 아빠가 바라는 선물을 해주지 못하는 것도 잘 안다. 그러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생일을 꾸민다. 편지를 쓰고, 축하 메시지 그리고 오려 붙여 그럴듯하게 준비한다. 삼 형제여서 어릴 땐 그런 아기자기 한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 두 딸을 키우는 덕분에 생일에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13년째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생일상은 아내의 몫이 되었다. 생일상을 차려주는 부담을 던 어머니는 그래도 해마다 잊지 않고 전화를 했다.

“아침에 미역국은 먹었니?”

“일찍 출근해서 못 먹었어요. 저녁에 먹으려고요.”

“생일인데 아무거나 먹지 말고 좋은 걸로 챙겨 먹어. 설렁탕이나 갈비탕 같은 걸로. 냉면도 한 그릇 먹고. 용돈 없으면 보내줄까?”

“잘 챙겨 먹으니 걱정 마세요. 그 정도 사 먹을 돈은 있어요.”


자식을 키워보기 전엔 생일날 받는 어머니 전화를 당연하게 여겼다. 내 생일이라 내 안부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조금씩 다르게 보였다. 어머니 한 여름 병원도 못 간체 새벽에 집에서 나를 낳았다. 몸조리도 못하고 그날 먹을 아침밥을 준비했다고 들었다. 내가 뱃속에 있을 때도 제대로 먹지 못해 임신 중독까지 걸렸다고 했다. 내 생일은 나보다 어머니의 안부를 먼저 챙겨야 했다. 내 입에 맛있고 좋은 음식을 넣기보다, 그 좋은 음식들을 먼저 어머니 입에 넣어드려야 했다. 내가 미역국을 먹을 게 아니라 나를 낳고 몸조리도 못했던 어머니가 드셔야 했다. 질긴 냉면을 먹고 오래 살아야 하는 건 내가 아닌 어머니였다. 친구들과 직장 동료가 챙겨준 생일도 의미 있었고 기억에 남아있다. 여름만 되면 무의식 중에 냉면에 눈이 간다. 생각해보면 생일날 냉면은 먹은 기억은 별로 없다. 하지만 냉면을 먹어야 한다는 그 말이 기억에 새겨진 것 같다. 어머니 뱃속을 나온 순간부터 마흔이 넘도록 해마다 생일을 잊지 않고 챙겨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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