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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Sep 28. 2021

일기를 다시 쓰는 이유

기록의 힘

2018년 10월 즘부터였다. 팔자에 없던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방학 숙제로 한 번에 몰아 쓴 일기가 마지막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군대, 직장 생활에서 결혼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안 했다. 아마 일기는 숙제라는 생각이 깊이 남아서 일수 있다. 숙제처럼 써야 하는 일기라면 안 쓰고 만다는 생각. 어른이 되면서 좋았던 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숙제'가 없다는 거다. 반대로 누군가 내주는 숙제는 없지만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숙제'는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닌다. 차라리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하는 게 인생에서 가장 편한 시기였던 것 같다. 그때를 지날 땐 몰랐다. 이제와 누가 하라는 사람도 없는 굳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왜 다시 쓰기 시작했을까?


행복을 행복이라고 느끼는 건 불행을 겪어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처 행복만 경험한 사람은 행복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한다. 불행을 경험해본 사람은 일상의 소소한 것조차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그게 행복이라고 알게 된다. 최악이라고 느꼈던 그때가 있었기에 딛고 올라갈 곳이 보였다. 딛고 일어서라고, 여기가 바닥이라고 알려주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면 바닥은 보이지도 발에 닿지도 않는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 자신이 바닥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주 나중에 알게 됐지만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그 상황은 스스로 만들어낸 다는 것이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최악으로, 최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결국 내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그걸 몰랐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때 나는 최악이라고 받아들였다. 책이 최악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 같았다. 6개월 쉼 없이 읽었다. 읽으니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쓰게 되면서 발이 바닥에 닿는 게 느껴졌다.


마음이 끌리는 문장을 만나면 왜 끌리는지 적었다.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드는지 적었다. 눈 뜬 새벽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을 적었다. 무엇 때문에 불만이 생겼는지 적었다. 불평불만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버스 안에서, 지하철에서, 걷다가, 카페에서, 상사의 눈을 피해 썼다. 매일 떠오르는 조각 생각들이 흩어지기 전에 붙잡아 두었다. 그런 조각들을 붙이면서 어그러졌던 나를 온전히 보게 되었다. 나는 아직 쓸만했다. 단점을 보기보다 장점을 보기로 했다. 단점을 고치는데 에너지를 쓰기보다 장점을 키우는데 역량을 키워보기로 했다. 그렇게 바닥에 두 발로 섰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10개월이 지났다. 하루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일어나는 시간, 어떤 책을 읽었는지, 생각이나 감정을 블로그에 남기고, 직장에서 어떤 일과를 하는지, 무엇을 하며 얼마 큼의 시간을 쓰는지 기록했다. 플래너에 시간을 기록했다면, 일기장에는 나를 기록했다. 부족한 부분을 반성하고, 내일의 각오를 다지고, 잘한 건 칭찬했다. 일기는 매일 쓰는 한 편의 글과는 달랐다. 일기는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한다. 매일 읽는 책과 글이 나의 손 발을 움직이게 한다면, 일기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살아내지만 당장 눈에 띄지 않는 변화에 조바심 나는 마음을 바로 잡아야 했다. 자칫 그동안 쌓아온 것들을 일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똑바로 잡아준 건 일기였다. 1년 동안 일기를 썼다. 덕분에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조금씩 올라가게 되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거나 맞추지 않고 오롯이 내 속도와 의지로 나아가고 있다.


힘겹게 페달을 밟아 오르막 오르는 이유는 내리막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리막을 내려갈 때 편안함은 오르막의 힘듬을 잊게 한다. 내리막은 또 다른 오르막을 위한 잠깐의 휴식일뿐이다. 내리막의 즐거움에 취해 발을 떼면 굴러가는 타성에 젖는다. 1년이 지난 어느 때부터 일기를 안 썼다. 안 쓰니 편안했다. 삶도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 같았다. 이대로만 가면 어딘가엔 닿을 것 같았다. 틀리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고 격려해주었다. 다시 1년 반 동안 페달을 밟지 않은 체 유유히 달려왔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페달을 몇 번만 굴려도 금방 지쳤다. 지칠 때면 그만 타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잠깐 내려서 걸어볼까. 이 속도라면 걷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을 거라면 다가올 오르막을 준비해야 했다. 다리에 힘을 키워야 했다. 그래서 6월부터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지금 일기를 쓰는 이유는 이전과 다르지 않다. 하루를 돌아보며 부족한 부분을 반성하고, 내일의 각오를 다지고, 잘한 건 칭찬한다. 매일 10분 동안 나에게 집중하며 나를 들여다본다. 여전히 나만의 속도로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내 길을 가고 있다. 내가 정한 목적지를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 늘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 안은 다르게 채우고 있다. 일기를 통해 매일 다른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일기는 잔 근육을 만들어 준다. 그동안 풀렸던 근육을 다시 만들고 있다. 넘어야 할 오르막이 나타나면 있는 힘껏 페달을 밟기 위해 오늘도 일기로 근육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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