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형준 Oct 11. 2021

내 안에 잠든 꾸준함을 깨워라

꾸준함이 성과를 만든다

매주 일요일, 아파트 지정 분리수거일 이다. 단지 한 곳에 분리수거함을 설치해 일주일치 재활용품을 내다 놓는다. 분리수거는 내가 담당한다. 하루 중 언제 하더라도 꼭 임무를 완수한다. 매주 분리수거장을 오가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얼굴도 있다. 그중 우리 둘째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다. 가끔 마주치지만 볼 때마다 아이의 몸이 들어갈 것 같은 장바구니 가득 재활용품을 들고 나와 분리수거를 하고 있었다. 정리를 마치고 같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며 물었다.

"혼자 잘하네. 몇 학년이니?"

"2학년이요."

"2학년? 아저씨 딸도 2학년인데. 대단하다."

낯선 나를 보고 먼저 인사를 할 정도로 바른 아이였다. 분리수거도 처음은 부모님이 시켜서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매주 하는 건 스스로 하겠다는 의지가 더 커서 일수 있다. 시켜서 해야 하는 일은 오래 이어가지 못하는 법이다. 학생 때 매일 숙제를 내줘도 하고 싶은 게 아니니 안 해 갈 때가 더 많은 것과 같은 이치일 거다. 좋아하는 과목은 숙제가 없어도 알아서 공부하지만 그렇지 않은 건 앉아 있는 시간이 괴롭기 마련이다.


분리수거장에서 만난 남자아이를 보면서 나는 그 학년 때 어땠는지 생각해봤다. 학교는 가기 싫은 곳이었다.  숙제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했다. 그렇게라도 안 했으면 손도 안 댔다. 가방만 벗어놓고 밖에서 놀거나 넋 놓고 TV 보는 게 전부였다. 학교 갔다 오면 먼저 해 놔야 하는 것들을 스스로 한 적이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님도 없었다. 그러니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야 하는 것조차 못하는 그런 아이였다. 초등학교 2학년에게 스스로 하길 바라는 게 지나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어쩌면 하나부터 열 까지 부모의 지시를 받는 게 당연한 때이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기 때문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던 때여서 부모님도 우리들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한 밤중에나 얼굴 볼 수 있었다. 일에 찌든 부모님은 자식들의 숙제나 준비물을 챙기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그런 날이 쌓이다 보니 알아야 하는 것보다 놓쳤던 게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 나서도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더 나은 직장을 얻기 위해 다양한 자기 계발을 시도했지만 만족할 만큼의 성과를 낸 적이 없었다. 토익, 자격증 시험이 그랬다. 늘 부족하다고 느끼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끈기가 부족했었다. '왜'는 알았지만 '어떻게'에 대한 고민을 안 했다. 사람 생김새가 제각각이듯 방법 또한 달라야 한다. 개개인의 가치관과 성향, 삶의 방식에 따라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걸 몰랐다. 성과를 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무작정 따라 하니 얼마 못가 지치고 말았다. 지치면 포기할 이유를 찾는다. 이유는 사소하다. 퇴근이 늦어서, 약속이 생겨서, 교재가 없어서, 피곤해서 등 핑계 같지 않은 핑계로 합리화했다. 


매일 책을 읽은 지 3년 10개월 째다. 지금까지 살면서 무언가를 이렇게 오래 지속한 게 처음이다. 대부분 6개월 이내로 끝나기 일수였다. 아마 읽는 방법을 따라 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 같다.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묻는 질문에 지나온 과정을 되돌아봤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컸던 건 호기심을 잃지 않았던 거였다. 그동안 다양한 시도들이 실패했던 이유는 싫증을 쉽게 느껴서였다. 한두 달 하다 보면 지루해진다. 어떤 일이든 꾸준한 반복만이 성과를 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걸 몰랐을 때는 반복에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반복은 지루할 수밖에 없다. 지루함을 이겨내야 지속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지루함을 이겨낼 방법은 스스로에게 있다. 내가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책 때문이었다. 하루 나 이틀에 한 권씩 읽으며 수시로 호기심을 이어갈 수 있었다. 늘 새로운 내용, 다른 장르를 읽으며 책과 독서에 흥미를 잃지 않았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2018년 5월부터 쓰기 시작했다. 처음은 몇 줄 쓰는 것도 어려웠다. 그 몇 줄도 엉망이었다. 그런 수준에 책을 써보겠다고 여기저기 강의를 쫓아다녔다. 강의 들어도 당장 나아지진 않았다. 강의는 강의일 뿐 진짜 실력은 노력을 들인 시간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 다행인 건 그때는 노력과 반복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책 읽기를 반복하며 삶이 조금씩 나아졌고, 당연히 글쓰기에서도 성과를 얻고 싶다면 지루한 반복만이 답임을 알고 있었다. 글쓰기를 지치지 않고 반복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책 때문이었다. 글쓰기, 책 쓰기를 다루는 다양한 책을 읽으며 쓰는 방법을 익혔다. 글도 그냥 쓰는 게 아니었다. 특히 책을 쓰고 싶다면 그에 맞는 방법을 익혀야 했다. 초등학생이 덧셈 뺄셈을 배우듯 차근차근 익혔다. 하나씩 배울수록 호기심이 더 생겼다. 책을 통해 호기심을 채우며 꾸준히 써야 하는 이유와 동기도 갖게 되었다. 매일 똑같은 분량을 쓰지 못했다. 몇 줄만 쓴 적도 있고 몇 장을 쓴 적도 있다. 몇 줄만 썼다고 나 자신을 나무라지 않았다. 몇 장을 썼다고 나를 하늘 높이 띄우지도 않았다. 못 써도 '나' 잘 써도 '나'였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했다.     




처음 글쓰기를 배울 때 읽은 수 십 권의 저자들은 나름의 성과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성과가 부러웠다. 부럽긴 했지만 조바심 내봐야 얻어지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내 속도대로 꾸준히 했을 때에만 바라는 성과를 얻게 된다. 성과를 내는 건 꾸준함 뿐이었다. 꾸준히 할 수 있는 동기는 누가 대신해줄 수 없다. 다른 사람의 방법을 배워 따라 한다고 똑같은 성과가 나는 것도 아니다. 혹자는 똑같이 따라 해서 성과를 낸 사람도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았다. 수 십 명의 방법을 배우고 따라 했지만 결국 스스로 지속할 수 있는 동기와 방법을 찾지 못하면 바람 빠진 풍선 꼴이 되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어려워한다. 이유는 다양하다. 다양한 이유만큼 해결 방법도 다양해야 한다. 누구 한 사람의 방법만을 최선이라 여겨서도 안 된다. 물론 효과적인 방법은 참고해서 내 것으로 만들 필요는 있다. 내 것이 되고 나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결국 자신만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방법을 전하는 사람은 자신의 것이 최선인양 강요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만든 방법을 통해 만들어낸 성과는 자신에게만 한계를 지어야 한다. '내가 이만큼 성과를 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는 건 지나친 일반화이다. 그들이 이룬 성과는 동기부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여야 한다.  나는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동기부여는 자신 안에서 찾는 거라 생각한다. 귀가 두 개인 이유는 두 개의 소리를 들으라는 의미이다. 하나는 타인의 좋은 점을 듣고, 다른 하나는 자신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게 두 개의 소리가 일치하는 곳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 믿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