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 수는 있지만 외롭지 않게
소통 :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소통은 공존이다'
자료를 검색하다 만난 문장입니다. 제목을 알 수 없는 책의 중간 제목이었습니다. '소통'을 주제로 2주째 생각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소통이 원활하면 오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오해는 상대방에 대해 잘 모르거나 잘 못 이해했을 때 생깁니다. 반대로 말하면 상대방을 잘 알고 바르게 이해하면 오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서로를 알아가는 수단으로 대화가 있습니다. 대화는 상대와 마주하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행위라고 합니다.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상대방과 마주할 기회가 많아진 요즘입니다. 그중 SNS를 소통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SNS의 장점은 다양한 계층과 여러 형태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SNS는 자신의 생각, 감정, 정보 등을 사진, 글, 영상을 활용해 전달합니다. 대화와 다르게 상대방을 특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건넨 말에 공감하거나 외면하는 건 상대방의 몫입니다. 공감하는 이들은 다시 말을 걸어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기도 하고 또 다른 정보를 전달해주기도 합니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체 글자로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습니다. 일종의 대화입니다.
오해 :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뜻을 잘못 앎. 또는 그런 해석이나 이해.
SNS를 통해 건네는 말은 얼굴을 마주한 대화보다 전달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글이나 사진 만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같은 표현이라도 보고 듣는 사람의 상황과 생각에 따라 이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오해는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A'라고 말한다고 상대방도 무조건 'A'라고 이해해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만고불변의 진리를 제외하고는 내 생각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믿고 있는 불변의 진리도 한 번쯤 의심해 볼 필요가 있는 요즘입니다. 그러니 상대의 반응을 신경 쓰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에만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말에 진정성을 담고 사실을 말하면 있는 그대로 전달될 테니까요. 상대방도 그렇게 건네는 말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일은 적어질 겁니다. 오해의 폭을 줄이는 노력이 소통의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2018년 8월, 블로그를 시작으로 브런치, 인스타그램을 활용해 소통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기록하고, 생각을 글로 남기는 게 대부분입니다. 거의 모든 글에 제 생각을 담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이렇게 느꼈습니다.'
'오늘 이런 일이 있었는데 저에게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제 생각, 감정을 글에 담아 여러 사람에게 말을 겁니다. '좋아요'를 눌러주기도 하고, 자신의 느낌을 댓글로 남겨주기도 합니다. 다행히 아직까지 제 글에 악의적인 내용을 남긴 분은 없습니다.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아마 그런 댓글을 만나면 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짐작이 안 됩니다. 심하게 멘털이 나갈 수도 있고, 그냥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겁니다. 3년 넘게 SNS를 하다 보니 제 나름의 원칙을 정해놓았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자.'
댓글을 남겨주는 분 중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지적해 주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의견이 더해지면서 생각에 근육이 붙는 것 같습니다. 내가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으면 얻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더 중요한 건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다름을 인정하며 '오해'를 줄이고,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되면서 '소통'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존 :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함.
1980년 대 집전화는 가입비를 내야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돈으로 12 ~ 24만 원을 냈습니다. 물론 가입비는 해지 시 환급받는 돈입니다. 1970년 100만 원이 넘는 비용을 낼 때보다는 저렴해졌습니다. 그 덕분에 집집마다 전화기가 놓이게 되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집전화는 소통의 도구였습니다. 다만 사용하는 만큼 요금을 내기 때문에 마음껏 쓰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다 부모님 몰래 긴 통화를 하면 여지없이 다음 달 고지서에 들통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유선전화보다는 얼굴 보며 소통하는 게 오히려 속 편했습니다. 이후 등장한 삐삐는 또 다른 형태의 소통 도구가 됩니다. 유선전화와 세트로 활용되면서 소통에 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다시 삐삐를 대체하는 PCS폰이 등장하면서 소통의 속도는 더 빨라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유선전화의 활용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지금 우리 손에 있는 스마트 폰이 세상에 나옵니다. 스마트 폰은 속도뿐 아니라 대상의 한계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누구와 언제 어디서든 소통이 가능해진 세상이 되었습니다. 기회와 방법이 다양해진 만큼 소통도 더 활발해졌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SNS를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도 늘었다고 합니다. 2019년 '트렌트 모니터'에서 전국 성인 남녀 1000명 중 '평소 외로움을 느끼는 편'이라고 답한 이들에게 일상생활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응답자 중 37%가 '딱히 만날 사람이 없다는 느낌이 들어서', 31.3%가 '그냥 세상에 나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또 30.4%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과 비교가 돼서' 마지막으로 28.7%가 '마음을 터 놓을 사람이 없어서'라고 답했습니다.
딱히 만날 사람이 없어서, 그냥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가 돼서, 마음을 터 놓을 사람이 없어서 외롭다고 합니다. 손안에 스마트 폰 하나로 누구와 언제든 연결될 수 있지만 더 외로워졌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마음을 터놓고 대화 나눌 사람은 없다는 의미이겠지요. 혼자만 잘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누군가와 어떤 형태로든 연결이 되어야 할 겁니다. 그게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연결되고 소통하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소통의 형태가 변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것도 달라질 겁니다. 얼굴 보고 대화 나누는 게 최선이었던 때는 손 잡아주고 등을 토닥여 주길 바랄 겁니다. 지금은 내가 건네는 말에 공감해주고 위로의 한 마디를 남겨 주길 바랄 겁니다. 대화의 본질은 상대방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한다고 본질이 없어지는 건 아닐 겁니다. 내가 바라는 걸 상대방도 똑같이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혼자 살 수는 있지만 외롭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진심을 담은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이 상대에겐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서로 도와 함께 존재하는 '공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