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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Nov 05. 2021

침묵, 소설 쓰고 앉았네!

못하는 건 접아두기로

나를 사랑하긴 하나? 왜 나랑 결혼했지? 한 번쯤 져주면 안 되나? 연애할 때는 몰랐는데 이런 면도 있었네, 이러고도 잠이 와?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게 TV를 보고 있지? 나는 안 보이는 사람처럼 행동하네, 나도 그냥 모른 척해버릴까? 내일 일어나면 어떻게 얼굴 보지? 아닌 말로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오래 말을 안 할 수 있지? 나만 잘못했나, 자기는 아무 잘못 없는 것처럼 그러네. 손바닥이 혼자 소리 나냐! 이제 그만 좀 풀고 말 좀 걸어줘 봐, 나는 이미 다 풀렸단 말이야, 아! 답답하네, 내가 먼저 말하자니 모양 빠지는데 좀 더 버텨볼까? 그래 지난번에도 이 고비를 넘기니 먼저 말을 걸어왔었지, 이번에는 못 이기는 척 봐줄까? 나는 잘못한 게 없으니 이해해주는 척 마무리하면 될 거야.      


며칠 동안 상상 속에서 소설을 쓰고 있다. 소설을 쓰는 내내 아내와 냉전 중이었다. 한 번씩 다툼이 있으면 내가 먼저 입을 닫고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아내도 그런 나를 따라서 더 깊은 굴속으로 들어간다. 그때부터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 처음 하루는 문제가 된 사건에 집중한다. 이틀이 지나면 문제보다 아내에게 슬슬 화가 난다. 삼 일째 되면 입이 근질거린다. 사흘 째 되면 한 마디 툭 던진다. 던진 말은 아내가 반응하면 은근슬쩍 아무런 일 없었던 것처럼 처음 모습으로 돌아간다. 만약 이때 아내가 반응하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는다고 더 화가 난다. 정작 화를 낼 사람은 아내인데도 말이다. 다시 하루를 넘긴다. 이제부터는 이성보다는 감정적으로 행동한다. 말로 표현은 안 하지만 상대방이 상처 받을 만한 행동을 서슴없이 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차라리 처음부터 말싸움 한 판하고 털어버리는 게 낫겠다 싶기도 한다. 아내와 나는 말로 치고받는 싸움을 안 한다. 결혼 초부터 다툼이 있으면 내가 먼저 입을 닫아버려 더 이상 말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었다. 그런 내 습성을 낯설어하던 아내도 시간이 지나면 차츰 적응했다. 아내도 나와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걸로 적응했다. 정말이지 말을 안 하고 눈치만 보는 건 할 때마다 느끼지만 할 짓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고치지 못하는 건 분명 내 잘못이 큰 게 확실하다.      


부부로 살다 보면 부딪히는 경우가 생긴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살다 보면 당연하다. 함께 살기로 한 이상 서로에게 맞추어야 할 의무도 있다. 내 생각, 내 습관, 내 방식만 고집하면서 살 수 없다. 내가 하나를 양보하면 상대방도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그게 배려고 이해라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순간이 배려와 이해로만 될 수 없다. 크기가 다른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려면 톱니바퀴의 모양을 알맞게 깎아야 한다. 어느 한쪽만 깎아서는 안 된다. 맞물리는 양쪽 다 알맞은 크기로 만들어야 한다. 사람 사는 게 톱니바퀴 물리듯 완벽하게 돌아가면 싸울 일도 화낼 일도 없다. 하지만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고 살아온 방식이 있다 보니 다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중요한 건 이때를 어떻게 극복해 내느냐 인 것 같다. 나의 고등학교 동창, 아내의 대학 동기를 서로 소개해줘 결혼하게 된 부부가 있다. 서로 잘 아는 사이다 보니 결혼 후 10년 넘게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함께 모여 술잔을 나누며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기도 한다. 애정이 담긴 불만일 때도 있고, 감정이 상할 만큼 섭섭했던 일을 꺼내놓기도 한다. 그들은 우리가 있는 것도 아랑곳 않고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시작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담아두었던 말들이 댐이 터지듯 입 밖으로 터져 나온다. 감정이 격해지면 육두문자가 나오기도 한다. 물론 애정이 담긴 육두문자라고 할 수 있다. 지켜보는 우리 부부는 아슬아슬하다. 저러다 무슨 사단이라도 날 것 같다. 아내와 내가 눈치를 주고받고 둘 사이를 끼어들어 보기도 한다. 그게 먹히면 싸움이 마무리되지만 그마저도 소용없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건 이다음부터다. 어찌어찌해 싸움이 일단락되면 다시 원래의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죽고 못 사는 모습을 연출한다. 우리 부부가 앞에 있어서 보여주기 위한 의식적인 행동인지는 모르나 적어도 내가 아는 내 친구는 그런 가식을 부릴 줄 모른다. 그들 부부의 싸움은 그런 식이다. 있는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낸다. 싱크대 하수구에 모이는 음식 쓰레기를 남김없이 버려야 냄새가 나지 않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그 순간 다 꺼내놓는다. 그러니 침묵하며 상상하고 오해할 일이 없다. 우리 부부와는 정 반대다.      


내 기억은 6살부터 시작된다. 부산생활을 정리하고 성남으로 이사 오고부터다. 부모님은 무일푼으로 몸만 올라왔다고 했다. 다섯 식구가 발 뻗고 잘 집도 없었다. 하루 벌이를 하며 세 아들을 키우는 건 만만치 않았다. 학년이 올라가도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생활이 팍팍하니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 탓에 두 분은 늘 서로에게 불만이 가득했다. 조금 과장하면 눈 만 뜨면 싸웠던 것 같다. 그 모습을 24살 독립하기 전까지 봐왔다. 그러니 싸우는 것 자체가 싫었다. 내가 싸우는 것도 싫었고, 남이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도 불편했다. 아내와 연애할 때는 싸울 일이 없었다. 의견 차이 나는 건 내가 양보하거나 아내가 배려하면서 목소리 높이며 싸우지 않았다. 결혼 후에도 싸울 때면 입을 닫았다. 입을 닫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 여겼다. 하지만 침묵하는 동안 이어지는 상상이 더 화를 키운 꼴이었다. 그러니 서로 지쳐갔다. 

“이럴 거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치고받고 싸우고 말자,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다.”

나도 아내 말에 공감했다. 침묵하는 동안 삼류 소설만 쓰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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