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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Nov 15. 2021

가방 받아줄까요?

영등포 소방서 앞에서 좌석버스로 갈아탄다.

버스 번호별로 승차위치가 지정되어 있다.

퇴근시간 사람이 몰려 줄 끝에 서게 되면 앉아간다는 보장이 없다.

앞 버스가 금방 떠난 뒤면 앞 줄에 서게 되고 원하는 자리에 앉아 가기도 한다.

1500번은 영등포를 출발 일산 중앙로 가로질러 운정, 교하까지 들어가는 장거리 코스다.

그러니 늦게 탈 수록 자리가 없고 서서 가게 된다.

좁은 통로에 가방까지 맨체 버스의 리듬에 몸이 앞뒤로 흔들리면 한 숨이 절로 나지 싶다.


고등학교 입학 첫 해는 왕십리에서 대방동까지 버스 타고 학교를 다녔다.

이듬해 에는 잠실에서 대방동까지 버스로 다녔다.

왕십리에서 다닐 땐 여의도를 지났고, 직장인 퇴근 시간에 걸리면 일렬로 세운 맥주병 마냥 꼿꼿하게 서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실에서 다닐 때도 마찬가지다. 여의도에서 출발한 버스가 대방동 학교 앞에 도착하면 버스 안은 이미 모종을 심어놓은 듯 사람 머리만 보였다.

한 번은 운동장에 놀다가 7시 넘어 버스를 타게 됐다.

여름이었던 것 같다.

입고 있던 옷은 이미 땀에 젖어 있었다.

가방을 메고 버스를 타도 되나 싶을 정도로 냄새가 신경 쓰였다.

집에 안 갈 수 없으니 쪽팔림을 무릅쓰고 버스에 탔다.

사람 많은 버스에서 자리에 앉는 건 그날의 운빨이다.

몸도 피곤하고 땀 냄새까지 나니까 서 있기 무안했다.

그렇다고 나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선한 사람은 없을 터였다.

눈꺼풀은 이미 땅으로 꺼지고 있었다.

두 팔로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었지만 졸음이 급습할 때면 다리가 풀리면서 지켜보는 사람에게 몸개그를 선사해준다.

한 번씩 그럴 때면 괜히 민망해서 아닌 척해보지만 이미 본 눈들은 웃음을 참지 못 하기도 한다.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20대로 보이는 여성분이 기꺼이

'가방'을 들어주셨다.

가방이라도 덜어내니 한결 가벼웠다.

그때는 내 경우처럼 가방을 받아주는 게 자연스웠던 때였다.


옆자리 아가씨가 잠에 취해 내 어깨에 머리를 들이받고 있다.

내 몸은 창쪽으로 더 쪼그라들고 있다.

어깨를 내주는 건 상상도 못 한다.

괜히 그랬다간 몹쓸 짓을 당할 수도 있는 세상이다.

가방도 받아주겠다는 사람을 못 본다.

받아주겠다고 손 내밀면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

퇴근 시간 버스 안에는 대부분 피곤한 사람들이다.

치일 때로 치여 몸을 눕히기 위해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아침엔 무게감을 못 느꼈던 가방도 퇴근길 버스에서는

집어던지고 싶을 수 있다.

그런 애물단지를 기꺼이 받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받아달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거다.

눈빛으로 말해봐도 외면받는 게 현실이지 않을까?


'이봐요 아가씨, 나 곧 내려야 되는데 정신 좀 차려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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