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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Nov 18. 2021

여전히 부족한 말솜씨, 그래도

못하는 건 접어두기로

말을 무기로 두 딸에게 상처를 입혔다. 따뜻한 말로 감싸주고 보호받아야 할 때였다. 힘이 있다는 이유로 난폭한 말을 뱉어냈다. 두 딸은 이유도 모르는 체 내가 뱉어내는 날카로운 말을 맨 몸으로 받아냈다. 그때 나는 불안했다. 불안이 한순간에 생긴 건 아니었다. 중고등학교를 지나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내 안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여왔다. 


나의 생활습관을 배려해 주지 않는 형들에 대한 불만, 삼일에 한 번 꼴로 발톱을 드러내며 싸우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 4년 반을 매달렸지만 갑자기 도망간 대표로 인해 직장을 잃은 절망감, 더 나은 직장을 얻기 위한 자격증 시험을 번번이 포기하는 나약함, 자기 계발을 위해 책을 사지만 끝까지 읽지 못하는 게으름, 할 일이 있어도 핑계부터 생각하는 나태함. 이런 감정들이 내 안에 견고하게 자리 잡았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불안도 함께 자랐다. 마흔이 넘으면서 직장 내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나를 찾는 곳도 내가 갈 수 있는 곳도 없었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돌아갔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옷을 만들어내듯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됐다. 남들은 하기 싫지만 누군간 해야 하는 일이 내 일이었다. 그 일이 싫다고 회사에 한 마디 못 했다. 말한다고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출근할 회사가 있고 해야 할 일이 있고 제때 월급만 나오면 그만이었다. 쌓이는 불만은 술로 풀었다. 내 말을 들어주는 몇몇 사람만 붙잡았다. 술자리 횟수가 늘어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술자리는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걸. 결국 불안은 마모가 심해 두께가 얇아진 곳이 터지는 타이어처럼 힘없는 아이에게 향했다.     


불안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침묵을 선택했다. 나의 침묵은 상대방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였다. 침묵도 무기가 될 수 있다. 그 무기도 두 딸에게 향했다. 매일 매 순간이 새로운 두 딸은 쉼 없이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나의 침묵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손을 내밀었다. 내미는 손도 무표정으로 외면했다. 두 딸에게 웃음을 보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럴수록 두 딸이 다가오는 것조차 불편했다. 한 집에 있지만 나만 외딴섬이었다. 다가오지도 다가가지도 않으니 자연히 대화는 없었다. 두 딸이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물어볼 여유가 없었다. 아내가 직장에서 무슨 일 때문에 힘든지 알고 싶지 않았다. 아내도 내가 들어줄 여유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먼저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장모님이 두 딸을 위해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궁금하고, 들어주고, 이해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비겁하지만 아내와 장모님이 내 역할까지 해 줄 거라 믿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의 침묵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두 딸도 아내도 장모님도 말을 걸지 않았다. 한편으론 편했다. 다른 한 편으론 ‘이러면 안 되는데’ 싶었다. 어느 것이 맞는지 몰랐다. 아니 답은 알고 있었다. 침묵은 나는 물론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무기다. 특히 가족 안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때의 나는 두 딸에게 두 표정뿐이었다. 이유 없이 화만 내는 아빠, 얼굴은 보고 있지만 아무 말하지 않는 아빠. 두 딸에겐 어느 표정도 두려웠을 거다.      

콘체르트(협주곡)의 어원은 라틴어 동사 ‘콘체르타레’에서 나온 말로 ‘경쟁하다’, ‘협동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콘체르타는 화려한 연주 기교를 구사하는 하나의 독주 악기와 관현악이 경쟁하듯 연주하는 것에 재미를 느껴 발전하게 되었다. 독주 악기에 따라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등으로 부른다. 곡의 구성은 빠름, 느림, 빠름의 3악장 안에서 독주가 돋보이는 부분, 합주로 어우러진다. 콘체르타는 독주자와 관현 악간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독주자와 경쟁하듯 연주가 이어질 때는 긴장감을 넘어 비장함마저 감돈다. 반대로 기교보다 조화를 이루는 구간은 웅장함에 넋을 놓고 듣게 된다. 이는 가족은 물론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가족은 경쟁보단 협동이 중요하고, 직장에선 경쟁과 협동이 필요하고, 인간관계에서는 이 둘을 조화롭게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할 거다. 어떤 관계이든 조화를 이루려면 대화가 필요하다. 경쟁이든 협동이든 소통이 되어야 하고 올바른 소통을 위해 대화를 두고 받아야 한다. 나처럼 화만 내거나 침묵만 하면 제대로 된 소통이라 할 수 없다. 사람은 긍정, 부정 두 개의 감정을 갖고 있다. 긍정이 우위에 있는 사람은 긍정적으로 비치고, 부정적인 말이나 태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 반대로 보인다. 이런 두 모습도 오랜 시간 걸쳐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독주자나 관현악 연주자도 각자의 악기가 제대로 된 소리를 내려면 오랜 시간 연습해야 한다. 연습 없이는 완벽하게 연주할 수 없다. 성격이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태어나면서부터 긍정이지 않았다. 배우고 익히고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변했다. 부정적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내가 화를 내고 침묵하게 된 게 주변 환경에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주변 환경보다 더 중요한 건 내 선택이다. 중고등학교를 지나 사회생활을 하는 내내 부정적인 감정을 선택했던 결과물이 나였다. 그런 태도를 갖게 된 건 철저한 내 선택이었다는 의미이다. 나는 불만, 원망, 절망, 나약함, 게으름, 나태함을 선택했다. 그래서 두 딸에게 화만 내는 아빠가 되었고, 가족에게 침묵하는 아빠가 되었다.   

   

연주자가 한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기 위해 연습이 필요하듯,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도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은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는 의미이다. 반복하다 보면 지루할 때도 오고 힘든 시기도 오기 마련이다. 힘들고 지루하다고 하루를 거르면 그만큼 실력은 제자리를 걷게 된다. 한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고 싶거나, 모두에게 공감받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지루한 반복만이 바라는 결과를 가져다준다.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전에 내가 어떤 태도를 갖고 살았든 달라지길 선택했다면 그에 따른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불만, 원망, 절망, 나약함, 게으름, 나태함 대신 감사, 이해, 희망, 강인함, 부지런함, 꾸준함을 선택하고 연습하는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내가 선택한 단어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했고 여전히 노력 중이다. 때로는 훈련이 싫어지는 것처럼 의지가 흔들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머리에서 떠올리는 문장이 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여기서 멈추면 그때와 다르지 않다’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있다. 그래도 멈추지는 않는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완벽보다는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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