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이제 너를 놓아주련다.
금주를 결심한 나에게
중학교 3학년, 백일주가 시작이었다. 집에서 5분만 걸으면 한양대학교 운동장이었다. 9시쯤 운동장에는 사람이 안 보이는 게 당연했다. 운동장 둘레로 계단으로 된 노천 스탠드가 있었다. 스탠드 한 단은 세네 명이 둘러앉아도 넉넉할 만큼의 폭이었다. 작은 형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진학 고민할 때 망설이지 않았다. 작은 형이 롤 모델이었다. 학교는 물론 전공도 형과 같은 걸 선택했다. 동문이자 후배였다. 형은 날라리는 아니었다. 다만 학교 생활을 즐겼던 것 같다. 당구도 쳤고, 담배도, 가끔 술도 마시는 것 같았다. 이미 술맛을 안 작은 형이 100 일 앞둔 나를 운동장 스탠드로 이끌었다.
"정말 마셔도 괜찮아? 나 중학생인데."
"괜찮아, 형이 주는 건 마시는 거야. 기껏 한두 잔일 텐데 걱정은."
일회용 투명 소주잔에 7부를 지켜 따랐다. 받아 들고 한참 망설였다. 내적 갈등 중이었다.
'형이 주는 거니까 괜찮겠지.'
'아니야, 그래도 이건 술이잖아. 난 아직 어려.'
형은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한 손에 새우깡을 들고 내가 마시기를 기다렸다. 인생 첫 잔에 새우깡이 안주였다. 크게 심호흡 후 코를 막고 입에 댔다.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던 탓에 아주 적은 양이었지만 온 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목구멍은 화끈했다. 과장하자면 불을 삼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타고 넘어가는 중간을 견디지 못하고 새우깡을 외쳤다. 형은 손에 있던 새우깡 몇 개를 얼른 입에 넣어줬다. 짠맛과 고소한 맛이 입에 썪이자 조금 진정됐다. 묘한 매력을 느꼈다. '이게 술맛이구나.'
첫 모금 이후 잔에 남은 술은 결국 다 내입으로 들어갔다. 그때 소주는 술맛보다는 일탈의 짜릿함 같은 것이었다. 겨우 한 잔 마시고 어지럽거나 취기가 도는 일은 없었다. 맑은 정신으로 형과 친구들이 다 마실 동안 자리를 지켰다. 겨우 한 병이었지만 꽤 긴 시간 마셨다. 형은 꼭 같은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격려의 말도 전했다. 백일주 덕분인지, 형의 기도 덕분인지, 시험을 잘 봐서인지 모르지만 결국 합격했다. 그때는 몰랐다. 고등학생으로 신분이 바뀌는 순간부터 술이 늘 내 곁을 지키게 된다는 것을.
고등학교 생활은 단조로웠다. 집 학교 당구장 다시 집. 어쩌다 용돈이 모이면 집 학교 당구장 호프집 또는 중국집 다시 집. 나는 중3 겨울방학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학기 중 꾸준히 용돈을 벌었다. 몇몇 친구는 나를 따라 함께 했고, 그 덕에 먹고 싶은 건 비교적 잘 먹었다. 거기에 연장선으로 당구를 치고 난 뒤 허기를 달래려 중국집이나 호프집을 갈 수 있었다. 당구장 아래층에 중국집이 있었다. 몇 번 만에 단골이 되었다. 사장님은 우리가 오면 넉넉하게 차려 주셨다. 단 술은 안 주셨다. 술은 호프집에서만 마실 수 있었다. 그래서 술 생각이 나면 단골 호프집을 찾았다. 호프집 사장님도 사복으로 갈아입은 우리가 고등학생인 걸 알았다. 알았지만 우리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주님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단골 호프집도 뚫을 수 있었다. 그때 인연을 맺은 당구장, 중국집, 호프집은 졸업 후 몇 년 동안 찾아가는 의리를 발휘하기도 했다. 이중 중국집은 졸업 후 찾아가니 기다렸다는 듯 그동안 팔지 못한 술을 원 없이 내놓았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가 찐하게 먹고 마시면 매출도 제법 쏠쏠했지 싶다. 고등학생이던 우리를 거둬준 사장님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다.
-계속-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결심을 다지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금주를 결심했습니다.
중3 이후 지금까지 마신 술을 더 이상 안 마실 겁니다.
남은 인생에서 술을 지우려고 합니다.
30년 가까이 마셔 뼛속까지 알코올이 스며있습니다.
긴 시간 함께 했던 만큼 보내주는데도 나만의 이별의식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글을 씁니다.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마음 편히 놓아주려고 합니다.
부디 나를 떠나 더 좋은 사람과 조우하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말이죠.
술로 인해 겪었던 수 없이 많은 사건 사고를 차분히 떠올려 보려고 합니다. 술을 통해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되새겨 보려고 합니다. 기억나는 틈틈이 적어 볼 겁니다. 기억을 떠올리는 만큼 기억에서 지우기도 쉬워지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