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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Feb 06. 2022

너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나는

발 뒤꿈치 각질이 또 일어나고 있다. 며칠만 놔둬도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며 스멀스멀 갈라지기 시작한다. 발바닥 수분을 충분히 빨아들인 쪽은 이미 들고일어났다. 먹을 만큼 먹었으니 그만 떨어져 주겠다는 듯 너덜너덜거린다. 너덜거리는 녀석 주변으로 부지런히 수분을 빨아먹는 놈들도 틈새가 선명해지고 있다. 며칠 전부터 양말을 벗을 때 걸리적거렸다. 출근 전 씻고 나오면 남아있는 수분 때문에 신을 땐 걸리적 거림이 없다. 하루 종일 운동화 속에서 땀과 사투를 벌인 양말, 그 안에서 발가락은 땀에 절었고 뒤꿈치는 이미 바싹 말라있다. 뒤꿈치 각질은 하루 동안 양말과 합의 일체가 되어 있었고, 벗기는 순간 이별의 아쉬움을 자신의 살점을 떼어내면서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벗겨진 양말 주변의 흰 가루가 헤어짐의 치열했던 순간을 흔적으로 남긴다. 


각질 제거용 도구가 필요할 때다. 아내는 올 겨울을 준비하며 각질 제거에 최적화된 녀석을 긴 시간 검색 끝에 장만했다. 움켜 잡기 편한 겉모양은 힘을 싣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행여 떨어져 나갈 녀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까 싶어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듯 야무지게 쥘 수 있는 형태다. 색깔도 금빛이다. 화려한 색에 현혹되어 그깟 각질 쯤은 잊어도 된다는 듯 매 순간 반짝이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 손에 도구를 들고 다른 한 손에 바디 워시를 덜어 들고일어난 녀석들을 달래며 거품을 내기 시작한다. 향에 취했는지 녀석들도 순순히 거품을 즐긴다. 시술 부위에 충분한 거품이 일었다 싶으면 두 눈 질끈 감고 각질제거기를 들이댄다. 종아리 근육이 선명해지도록 까치발을 한 체 사정없이 뒤꿈치를 밀어준다. 잠시 향에 취해 있던 놈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거친 듯 거칠지 않은 제거기의 표면을 온몸으로 당해내며 순순히 떨어져 나가 준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찰나의 미세한 느낌을 즐기며 뒤꿈치 곳곳을 누벼준다. 황금색인 녀석도 계속되는 작업에 힘에 부치는지 땀을 내기 시작한다. 손바닥과 녀석 사이 땀이 들어차고 미세한 유격이 생긴다. 녀석이 말을 건다. 

"내 비록 이놈들을 제거하기 위해 태어났소만 내 손으로 없애자니 나 조차도 적잖이 마음이 아프구려, 그러니 잠시 쉬었다 다시 합시다."

오른 발바닥의 각질은 그렇게 제거된다. 잠시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 왼 발바닥에 바디 워시를 칠하기 시작한다. 이내 왼쪽 발바닥을 차지하고 있던 놈들도 향기에 취해 미소를 머금은 체 하수구를 타고 먼 길을 떠났다.


사투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치열했던 순간을 뒤로하고 드라이기의 열기를 빌려 남은 물기를 허공으로 날린다. 각질제거기의 거친 공격을 받은 발바닥은 씩씩거리고 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네가 그러고도 주인이냐'며 한껏 토라져 있다. 당근을 줄 차례다. 어떤 종류의 피부도 단 몇 번으로 진정시킬 수 있는 지구 최강 보습을 자랑하는 '바세린'을 등판시킨다. 정갈하고 봉긋하게 다듬어진 면봉의 머리에 바세린을 듬뿍 찍어준다. 흡사 요염해 보일 수 있는 자태로 뒤꿈치를 응시하며 정성껏 바세린을 발라준다. 기다렸다는 듯 발바닥도 향을 음미하고 수분을 빨아들인다. 골고루 어느 한 부분 소외되지 않도록 정성을 다한다. 양쪽 발바닥 모두 충분히 적셔줬으면 이제 마지막 작업이 남았다. 날아가는 수분을 가둬 줄 랩핑 작업이다. 랩으로 두어 바퀴 돌려 감아주면 바셀린의 수분은 꼼짝없이 발바닥 안으로 깊이 아주 깊이 스며들게 된다. 그렇게 각질을 떠나보내는 의식은 마무리된다. 


마른 대지에 새순이 돋고, 앙상했던 가지에 봉오리가 맺힐 때쯤 겨울은 끝이 난다. 그때가 되면 발바닥 각질도 언제 그랬냐는 듯 모습을 감춘다. 다음 겨울을 기약하며 뽀송한 발바닥이 되어 양말 속에서 수줍게 내 몸을 지탱해 줄 테다. 입춘이 지났지만 봄기운은 아직이다. 여전히 한파의 기운이 매섭다. 한파가 거세질수록 각질도 위세를 떨친다. 오늘, 그 위세를 잠재울 의식을 거행하려 한다. 오늘을 마음껏 즐겨라, 각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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