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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Feb 12. 2022

감정, 통제가 아닌 바라보기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

금요일, 들뜬기분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갑니다. 이중주차로 빈자리 없이 차로 가득입니다. 하필 내 차 앞에 주차를 해놨습니다. 입술을 한 번 깨뭅니다. 앞유리 전화번호로 연락합니다. 운전자가 내려오기까지 막히지 않는 구간을 검색합니다. 지도 곳곳은 이미 붉은색입니다. 또 한 번 입술을 지긋히 깨뭅니다. 운전자가 차를 이동시킵니다.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옵니다. 도로 합류부터 만만치 않습니다. 이중주차만 안 했어도! 괜히 오른손으로 기어봉을 내려칩니다. 리듬을 타는 척 여러 번 내리칩니다. 사거리 교차로마다 꼬리물기가 이 이어집니다. 그 틈을 타 내 앞으로 끼어듭니다. 크락션에 손이 올라갑니다. 한 번에 눌러지지 않게 설계를 했는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애꿎은 핸들만 또 두드립니다. 정체 구간을 벗어났는지 속도가 나기 시작합니다. 이대로 멈춤 없이 달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찰나, 앞 차가 속도를 줄입니다. 옆 차선 차들은 기다렸다는 듯 질주 중입니다. 끼어들지도 앞으로 가지도 못 합니다. 이때 만약 크락션을 울리고 상향 등을 켜면 난폭운전으로 오해받습니다. 앞차는 규정속도로 가는 중이니까요. 입술 사이로 긴 한 숨이 샙니다. 한 숨으로는 부족했는지 한 마디 던집니다.

"빨리 좀 갑시다."

들릴 리 없습니다. 그런들 내 속만 탑니다. 앞차가 비켜주든가, 속도를 내 든가. 기어코 여유를 부리며  신호마다 다 걸렸고 하는 수없이 꽁무니만 쫓았습니다. 앞차 따라 신호에 서니 의외로 마음이 여유로워집니다. 이런 걸 해탈이라고 하나요. 


사무실로 가기 전 편의점에 들립니다. 전날 저녁밥이 부실했는지 배가 고픕니다. 집중이 안 될 것 같아 달걀로 허기를 채웁니다. 반숙란 두 개가 담긴 포장을 집어 듭니다. 업무 시작 전 고요한 틈을 타 달걀 깨는 소리가 퍼집니다. 금이 간 껍질을 하나씩 벗겨 냅니다. 충격을 주는 만큼 껍질에 금은 많이 생깁니다. 달걀의 꼭짓점 중 한 곳은 흰자 떨어진 빈 공간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충격을 주면 껍질을 벗기기 수월합니다. 시작은 좋습니다. 금이 간 껍질을 하나씩 벗겨 냅니다. 반숙이라 껍질이 한 번에 벗겨지지 않습니다. 완숙에 비하면 손이 많이 갑니다. 한 번에 떨어지지 않는 껍질에 짧게 심호흡을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조각난 껍질을 떼어냅니다. 여차히면 껍질을 따라 흰자 속살이 따라오기도 합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걸 보고 또 한 번 숨을 몰아 쉽니다. 손이 많이 갈수록 껍질 잔해도 많이 남습니다. 가뜩이나 큰 손가락으로 잡힐 것 같지 않은 껍질을 떼어내자니 화도 스멀스멀 일어납니다. 다시 한번 크게 한 숨을 내 쉬고 흰자 표면에 남은 껍질 찌꺼기를 떼어냅니다. 손가락 지문이 잔뜩 묻었지만 한 입 베어 물면 몰캉함이 전해집니다. 껍질 깐 수고를 보상받습니다. 다시 한번 심기일전해 남은 한 알을 마저 깝니다. 그렇게 흰자와 노른자가 배속을 채우면 마음에도 안정이 찾아옵니다.


작은 달걀을 까면서도 여러 번 심호흡을 합니다. 대량으로 삶아 낸 달걀이 내 의지대로 깔끔하게 벗겨질 리 없습니다. 이미 반숙은 껍질이 잘 안 떨어지게 삶아진 겁니다. 거기에 대고 이따구로 껍질이 벗겨진다고 성질을 부려도 알아주는 사람 없습니다. 도로가 막히는 것도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닙니다. 차가 없는 시간을 골라 다닐 수도 없습니다. 내 차 앞에 이중 주차한 운전자를 찾아가 미리 말할 수도 없습니다. 교차로에서 끼어드는 차를 막아 세울 수도 없습니다. 규정속도대로 달리는 앞차를 재촉할 수도 없습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내 의지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스트레스도 안 받고 상대방과 싸울 일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이상적인 일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시로 일어나는 사건에 우리 감정도 시시때때로 요동치게 됩니다. 요동치는 감정을 그대로 두면 더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하는 데는 이런 감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원치 않고 못마땅해도 참고 양보하고 이해하는 게 인간의 숙명일 겁니다. 반대로 참지 않고 양보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을 땐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 감정이 어떤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화가 나 있는지, 누구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이해의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감정은 폭주기관차가 될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우리는 자라며 어느 정도 감정을 통제하는 방법을 배우고 연습합니다. 모두에게 완벽하게 가르친다면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겁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매일 사건 사고가 일어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자신만이라도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저는 감정이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통제'가 필요하다고 적었지만 제가 말하는 '통제'는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통제는 직접적으로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감정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 감정을 직접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통제를 바라보기라고 생각합니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심리학에서 감정에 이름표를 붙여 준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내 감정이 지금 어떤지 들여다보며 그에 맞는 이름을 붙여주는 겁니다. 이름을 붙여주는 것만으로도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고 합니다. 이름이 대상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나에게 생기는 감정에도 이름을 통해 정체성을 부여하는 겁니다. 정체성을 가진 존재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됩니다. 다양한 상황에 여러 감정이 일어날 때도 이미 이름 붙은 감정을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그저 내 감정이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물론 쉬운 과정은 아닙니다. 전문가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쉽지 않고 혼자 할 수 없다고 언제까지 방치할 수도 없습니다. 혼자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일기 쓰기가 있습니다. 불편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글로 풀어내는 겁니다. 글을 쓰는 건 행동을 멈추고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행위입니다. 다른 생각을 물리고 있던 일에만 집중하고 그때 감정이 어땠는지 떠올려 보는 겁니다. 떠오르는 순간을 글로 옮겨 적어 봅니다. 적으며 하나 씩 되새기게 됩니다. 되새기며 그때의 내 감정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들여다보며 내 감정에 이름을 붙여 줍니다. 인정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씩 내 감정을 내 것으로 만듭니다. 단지 들여다보는 것 만으로 말입니다. 


손이 탈수록 시들해지는 식물도 있습니다. 손이 갈수록 건강해지는 꽃도 있습니다. 각각의 성질에 맞게 대해줄 때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볼 수 있을 때 휘둘리지 않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여전히 어렵지만 포기할 수 없습니다. 모든 감정에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 때까지 이렇게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오늘도 이 글을 통해 내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해 봤습니다. 이런 고민이 결국 제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란 믿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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