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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Feb 16. 2022

이불속에서 나오라는 말 대신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둘째 채윤이는 지난달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알파벳부터 배우는 게 재미있는지 집에서도 영어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냅니다. 언니 뒤를 따라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영어 단어를 읽으려는 시도를 합니다. 당연히 발음은 엉성합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릅니다. 처음 보는 단어를 읽어보고 뜻을 물어보길 반복합니다. 그제 저녁밥을 먹을 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엄마, 퍼플이 보라색이잖아 근데 바이올렛도 보라색인데 무슨 차이야?"

엄마에게 질문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내도 얼른 답을 못합니다. 저도 그제야 생각해봤지만 답을  몰랐고, 아내가 대답을 해주길 기다렸습니다.   

"글쎄, 엄마는 잘 모르겠네. 영어 선생님께 물어보면 답을 알려줄 것 같은데."

알겠다며 자연스럽게 넘어갔습니다. 뒤늦게 검색해보니 퍼플(purple)은 '자주색'으로 파랑과 빨강을 동일한 비율로 혼합하였고, 바이올렛(violet)은 '청자색'으로 빨강 50%, 파랑 100% 비율로 혼합한 색이라고 합니다. 저녁에 만나면 답을 알았는지 물어봐야겠습니다. 아직 모른다고 하면 아는 척 좀 해야겠습니다. 


영어에 관심을 보이다가도 금방 집중력이 흐트러집니다. TV에 눈이 가고 장난감에 손이 갑니다. 9시가 넘어가면 저도 아내도 각자 할 일을 합니다. TV 프로그램도 아내가 보는 채널로 옮겨 갑니다. 채윤이가 볼 수 있는 게 없어지니 호기심이 다른 곳으로 향합니다. 요즘 들어 그림 도안을 출력해 오리고 붙여 그 안에 솜을 채워 넣는 인형 같은 걸 만듭니다. 손으로 만드는 건 두뇌 발달에 도움이 된다니 말리지 않습니다. 어제도 9시가 넘어 도안 출력하겠다면 노트북 앞에 앉았습니다. 30분 넘게 검색을 하더니 원하는 도안을 찾고 출력까지 합니다. 출력한 도안과 가위, 풀, 테이프를 챙겨 TV 앞에 앉습니다. 도안 그림을 가위로 오리기 전 종이 뒷면을 투명테이프로 붙입니다. 손으로 눌렀을 땐 말랑한 촉감을 느끼기 위한 거라 테이프로 감아주는 거라고 합니다. 아마 완성도를 높이는 중요한 순서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저대로 노트북 화면에 열중해 있었는데 아이가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테이프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여분의 테이프도 없었습니다. 붙인 테이프도 마음에 안 들었나 봅니다. 손을 놓고 씩씩거리더니 안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잠시 혼자 놔뒀습니다.


쓰던 글을 마무리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이불을 걷어내니 다행히 울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분이 안 풀린 표정입니다. 저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기에 차분하게 말을 걸었습니다.(아이의 행동에 차분히 대응하는 게 여전히 어렵긴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속상해하고 있을까? 테이프가 없어서?"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입니다.

"채윤아, 짜증내고 이불 뒤집어쓰고 있는다고 없는 테이프가 생길까?"

또 말없이 고개를 가로졌습니다. 

"지금 테이프를 사러 갈 수도 없겠지?"

멀뚱히 쳐다만 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나을까? 아빠는 이불 뒤집어쓰고 있다고 테이프가 생기는 게 아니면 차리리 정리하고 남은 시간 동안 하고 싶은 걸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채윤이도 잘 생각해봐."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왔습니다. 잠시 뒤 곡선이 그려진 표정으로 방을 나왔습니다. 그러는 사이 잘 시간이 되었고 뒹굴던 가위와 종이를 정리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채윤이가 짜증을 부릴 때 받아주는 것보다 그렇지 못한 때가 더 많습니다. 아직 제 기분을 다스리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짜증을 짜증으로 받아치기 일수입니다. 한 번씩 그러고 나면 후회만 남습니다. 후회를 하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제 자신이 답답하기도 합니다. 분명 제 짜증을 받아내다 보면 아이 기분도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힘이 없으니 부모의 지시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불만이 생길 때도 언젠가 올 겁니다. 같은 일로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될 때면 아마 때를 놓쳤을 수도 있습니다. 반항심이 자리해버렸을 수 있습니다. 아이보다 조금 더 이성적이고,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게 부모일 겁니다. 때를 놓쳐 관계가 악화되기보다 수시로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제 맛을 아는 것처럼,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짜증없이 소통 다운 소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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