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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Feb 19. 2022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못하는 건 접어두기로

시험을 보면 결과가 궁금하다. 예고편을 본 영화는 결말을 예측하며 화면 앞에 앉는다. 메뉴판의 음식 이름만 보고 어떤 맛일지 짐작하게 된다. 시험은 답을 맞혀봐야 결과를 알 수 있고, 영화는 끝까지 봐야 결말을 알 수 있고, 주문한 음식은 입에 넣어봐야 맛을 알 수 있다. 정답지를 먼저 보면 시험의 분별력을 잃고,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는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맛을 아는 메뉴는 별다른 기대가 없어진다. 답을 알 수 없는 시험을 잘 보기 위해 눈앞에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결말을 알고 싶은 영화는 한 장면 한 장면 놓치지 않고 봐야 한다. 맛이 궁금한 음식은 한 입 한 입 집중해서 음미해야 한다. 바라는 시험의 결과, 궁금한 결말, 짐작했던 음식 맛이 더 가치를 갖게 되는 건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시험 결과, 영화 결말, 궁금한 음식 맛, 한 치 앞을 내다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현실이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지금에 집중하기로 했다. 


금요일 퇴근길, 어김없이 숫자와 마주 섰다. 지금 선택이 내일을 바꿔 놓는다는 믿음으로. 신중하면서도 신중하지 않았다. 대통령을 만나는 꿈을 꾼 적도, 돼지가 품 안으로 달려드는 꿈을 꾸지도 않았고, 얼굴도 모르는 조상님을 만나지도 못했다. 오로지 손끝에 내 운명을 걸었다. 믿음은 선명했다. 이 숫자들이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거라는 믿음이었다. 더 이상 은행에 굽신거리지 않아도 되고,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을 수 있을 테고, 네 식구가 각자의 공간을 가질 수 있는 넉넉한 집과 편의 기능으로 넘쳐나는 안전한 차, 친구들 앞에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음식값을 계산하는 내 모습.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이 모든 게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설령 이번이 아니어도 또 다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만 포기하지 않으면 나에게 올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일주일 뒤 달라질 내 모습을 내다보며 한 주를 버틴다. 현실은 시궁창이라도 꿈은 잃지 말라고 했다. 꿈을 꾸어야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고 시궁창 같은 현실을 벗어나게 해 줄 유일한 희망. 로또에 의지한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쌓여 일 년이 되었다. 일 년을 버텨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반복되는 직장생활, 매달 갚지만 줄지 않는 대출금, 먹고 싶은 것보다 먹지 못하는 게 더 많았고, 방 두 칸에서 네 식구가 무릎을 맞대고 살았고, 할부금이 남은 중고차, 얼마를 나누어 내야 할지를 술자리 시작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일주일 뒤를 내다보고 살았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월요일 출근 전, 어김없이 빈 화면과 마주했다. A4 한 장을 채워야 한다. 첫 문장을 쓰기 위해 생각을 다듬는다. 쉽게 떠오르는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떠오르지 않는다고 포기하는 날은 없다. 겨우 첫 문장을 시작한다. 첫 문장을 밑천 삼아 다음 문장을 이어간다. 한 단어씩 채우며 단락을 만들어간다. 단락이 완성되면서 생각도 다듬어진다. 하고 싶은 말은 정해져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올바로 전달할 수 있는 바른 표현을 찾아간다. 같은 단어가 반복되지 않는지, 조사는 맞게 썼는지, 띄어쓰기는 바른 지. 같은 뜻이지만 다른 표현은 없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본다. 길게 쓴 문장은 없는지. 주술이 안 맞는 문장은 없는지. 문맥이 안 맞는 문장은 없는지. 문장도 중요하지만 맥락도 놓치면 안 된다.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사례도 떠올려 본다. 그날의 경험을 독자의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는 마음으로 한 글자씩 채운다. 뜬구름 잡는 표현이 아닌, 멱살을 잡아 독자 앞에 앉혀 놓는다는 심정으로 쓴다. 그때의 감정, 생각,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옮겨 적는다. 내가 겪은 경험은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만큼 생생하게 쓸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다. 그렇게 또 다른 단락이 완성되어 간다. 내가 겪은 실패의 경험은 독자를 돌아보게 하고, 성공의 경험은 독자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숨김없이 가감 없이 내가 겪은 경험을 있는 그대로 적어 내려간다. 어느새 또 다른 단락이 완성된다. 이제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적는다. 메시지라고 공자님 말씀을 적는 건 아니다. 내가 겪은 경험에서 나는 무엇을 배웠는지, 무엇을 실천하고 있는지 적는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본관 건물은 1900년 초에 지어졌다고 한다. 벽돌로 쌓아 올린 3층 건물이다. 하루 동안 쌓을 수 있는 높이를 지켰고, 벽돌 사이 모르타르가 완전히 굳을 때까지 양생 시간을 지켰다고 전해 들었다. 느려도 원칙을 지키며 한 장, 한 단 씩 쌓아 올렸다고 한다. 그런 노력 덕분에 1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벽돌은 하루에 쌓을 수 있는 높이가 1.2m 이하로 정해져 있다. 그 정도 높이가 구조적으로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또 벽돌 사이 모르타르가 완전히 굳은 다음에 쌓아야 아랫단이 튼튼하게 버텨준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정해진 높이를 지키지 않으면 쉽게 무너지게 된다. 글도 벽돌을 쌓아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한 장 한 장 빈틈없이 채워져야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단어 하나하나가 알맞은 곳에 채워져야 의미를 제대로 전달 수 있다.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려면 글을 쓰는 그 순간에만 집중해야 한다. 빨리 짓겠다고 한 단을 건너 띌 수 없듯, 단어 하나가 빠지면 의미 전달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 글을 쓰는 그 순간은 오롯이 글에만 집중해야 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여유도 그래서도 안 된다. 하고 싶은 말을 올바른 표현으로 써내려면 지금에 집중하는 게 최선이다. 일주일 뒤 달라질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의 로또 숫자보다, 지금 눈앞 빈 화면에 한 글자씩 채우는 게 더 나아지는 내가 되는 현명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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