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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y 19. 2022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출간계약 소식 전합니다

전화는 언제나 무방비 상태에서 걸려온다. 걸려오는 전화 중 별일 아닌 전화는 없다. 하다못해 스마트폰이 알아서 분류해주는 스팸 전화도 그들 나름의 목적을 갖고 통화를 시도하니 말이다. 낯선 번호였지만 낯설지 않은 이름이 화면에 떴다. 차 안 스피커로 들리는 목소리를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작가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이거 어쩌지요, 계약한 원고 출간이 힘들 것 같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출판사 사정이 어려워져 부도 직전입니다. 미안하지만 다른 출판사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작년 6월 계약서를 쓰고 8개월 만에 처음 걸려온 전화였다. 대표님은 앞뒤 자르고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앞뒤까지 챙길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단어 몇 개만 선명하게 들렸다. ‘코로나’, ‘부도’, ‘계약’, ‘다른’ 건널목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며 전화도 끊겼다. 운전대를 잡고 있길 천만다행이다. 운이 좋은지 막힘없이 달렸다. 속도를 낼수록 차선은 선명하게 보였다.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다음 교차로에 차가 멈췄다. 8개월을 기다려온 꿈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결혼 후 이듬해 상조 보험에 가입했다. 15**으로 시작하는 번호를 무시하지 못했고 역할에 충실한 상담사를 외면하지 못해 매달 19,900원짜리 상품에 가입했다. 수익자는 가족 중 아무나 가능하다고 했다. 아무나라고 했지만, 아무에게도 사용하고 싶지 않은 게 상조 보험이다. 보험을 깨는 일이 없길 바라면서도 보험에 가입하는 아이러니는 보험 상품의 마케팅 포인트다. 직원들끼리 커피 한 번만 안 마시면 되는 돈이니 부담도 없을 거라는 친절한 설명 덕분에 사인했다. 매달 통장으로 들어오는 월급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빈자리를 상조 보험이 충실히 메우고 있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걸려오는 전화는 없다. 앞뒤 없이 ‘아이고’만 외치는 어머니의 전화가 그랬다. 결혼 10주년 여행을 며칠 앞둔 일요일 오후, 큰형이 죽었다. 죽음은 예고가 없다지만 적어도 이건 아니었다.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떠나는 순간도 곁을 내어주지 않고 갈 줄은 몰랐다. 큰형은 TV에서 봤던 것처럼 바퀴 달린 침대에 흰 천으로 덮여 있었다. 싸늘한 시신이라고 표현하지만 싸늘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형은 2년째 투석 중이었다. 어느 순간 어떻게 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몸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형을 곁에 두고 싶었지만, 형은 원치 않았다. 책을 좋아했던 형은 한 번 잡은 책은 끝까지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마냥 매일을 살았다. 결혼도 못 한 자신의 삶이 단편 소설로 끝날 걸 알고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형의 죽음에 상조 보험을 깼다. 10년을 부은 보험금은 형을 보내기엔 충분했다.   

   

8개월 전 작성한 출간 계약서는 보험이었다. 47살, 은퇴를 준비하기엔 이른 나이지만, 준비 안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나이다. 43살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루 중 수시로 날아드는 스팸 메시지처럼 시도 때도 없이 읽었다. 읽다 보니 글을 쓰게 되었고, 쓰다 보니 출간 계약까지 하게 되었다. 출간 계약을 하며 은퇴 준비로 작가만 한 직업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출판사 출간 일정에 밀려 1년을 기다려 달라는 부탁에도 기꺼이 믿고 기다렸다. 형제의 연이 끊어지기까지 예고 없는 한 통의 전화가 시작이었듯, 작가가 되겠다는 꿈이 날아가는 것도 몇 초의 통화로 충분했다. 전화를 끊고 아무 생각 안 들었다. 다행히 업무가 많지 않았다. 생각해봤다. 내 탓이 아니었다. 내 잘못도 아니었다. 최근 2년 사이의 일은 누구의 잘못을 탓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나와 출판사는 또 다른 피해자일 뿐이었다. 보험은 꼭 필요한 순간 빛을 발한다. 적립금이 많을수록 혜택도 많아진다. 매달 내는 보험료는 얼마 아닐 수 있지만, 그 돈이 쌓인 덕분에 큰형을 편히 보내줄 수 있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매일 쓴 글 덕분에 출간 계약까지 할 수 있었다. 비록 출간은 못 했지만 끝난 건 아니다. 지금의 실패는 성공하는 순간 빛을 발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보험에 가입하듯, 언제 어디서 누가 나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이렇게 한 편 적립한다.




이 글은 지난 2월 '좋은 생각' 공모전에 제출했지만 수상의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수상 욕심도 있었지만 그보다 이 날 일을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실패라고 여겼지만 주저앉지 않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날 이후 오늘까지 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쓰면서 다짐했습니다. 쓰면서 이를 갈았습니다. 조금 늦어지는 것뿐이라 위로했습니다. 나를 믿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확신했습니다.


인생 첫 책을 계약하고 1년을 기다리는 동안 두 번째, 세 번째 책을 계속 썼습니다. 첫 책 출판이 좌절된 전화를 받았을 때 세 번째 초고가 완성된 즈음이었습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흔들렸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 정해진 분량을 쓰는 게 지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계속 쓰고 고치기를 이어갔습니다. 세 번 퇴고 마친 원고를 5월 초 투고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제 계약했습니다. 다시 일 년 만에 첫 책을 계약했습니다.


투고하는 동안 출간이 취소된 원고를 다시 꺼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퇴고했습니다. 한숨만 나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결과만 바랐던 성급함이 글 곳곳에 묻어납니다. 마음을 다 잡고 처음부터 고쳤습니다. 고치면서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일 년 전 나보다는 조금은 나아졌구나. 평가는 독자의 몫입니다. 평가 앞에 당당하려면 후회는 없어야 할 겁니다. 나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믿는다면 어떤 평가에도 당당할 것입니다. 물론 평가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더 노력하는 게 바른 태도일 겁니다. 그래서 매일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시 출발선에 섰습니다. 일 년을 돌아왔지만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때가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시작하는 그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처럼 이제부터 제대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첫 책이 시속 300킬로미터의 속도는 못 내도, 비슷한 출력의 엔진을 여러 개 갖게 된다면 그보다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을 거라 믿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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