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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ul 05. 2022

아내 덕분에 얻은 새벽 시간

2022. 07. 05  07:44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지는 것 중 당연한 건 없다고 했습니다. 살아 숨 쉬는 자체에도 감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두 발로 걷고, 내리는 비를 보고, 사랑을 속삭일 수 있음은 당연하게 주어진 게 아닙니다. 건강하게 낳아준 부모님이 계시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감사할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상대에게 소원해지는 것 같습니다. 당연함이 쌓이다 결국 관계가 끝나기도 합니다. 누구를 탓할까요?


월요일, 퇴근 후 운동하는 날입니다. 운동 대신해야 할 일이 있어서 곧장 집으로 향했습니다. 도착하니 아내는 저녁밥을 차리기 위해 낮동안 쌓인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냉동실에 꺼내놓은 손질된 고등어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어제 만들어놓은 밑반찬과 고등어를 구워 저녁으로 먹으려는 것 같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아내 옆에 섰습니다.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늘 인상을 쓰고 다니는 건 아닙니다. 옆에 서서 무얼 해야 하나 눈치를 보는 데 아내의 혼잣말이 들립니다. "나도 새벽에 혼자 쓱 나갔으면 좋겠다."


우리는 14년 차 맞벌이 부부입니다. 그 사이 두 아이는 중학생,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두 아이가 갓 태어났을 땐 장모님이 육아를 맞아주셔서 편하게 직장을 다녔습니다. 둘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장모님도 시골집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때부터 직장이 가까운 아내가 두 아이 등교 준비를 책임졌습니다. 저는 결혼 후부터 줄곤 서울로 직장을 다녀 아침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습니다. 그 참에 자기 계발한답시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자신의 출근 준비와 두 아이의 아침밥, 입을 옷, 준비물까지 다 챙겨야 했습니다. 불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침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동하는 시간만 1시간이 넘고, 자칫 정체라도 되면 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러니 일찍 서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내도 머리로는 이해해주지만, 한 번씩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는 불만을 토해내곤 합니다. 그럴 땐 저도 가만히 듣고 있습니다. 아내가 애쓰는 건 사실이니까요.


직장이 멀고 차가 밀린다는 핑계로 집에서 일찍 나섭니다. 일찍 나선 덕분에 출근 시간 전까지 나를 위한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2시간을 오롯이 읽고 쓰는 시간으로 활용합니다. 그 시간과 노력이 쌓여 몇 권의 책을 냈습니다. 읽고 쓴 덕분에 저는 조금씩 변화해 왔습니다. 아이에게 소리 지르지 않고, 아내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려고 합니다. 기회가 주어진 만큼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렇게 행동해 왔고요. 제가 이런 시간을 누릴 수 있었던 건 아내의 희생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직장이 가까운 아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부모니까 '당연히'해야 하는 건 맞습니다. 그렇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감사한 마음도 사라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일 중 당연하게 주어지는 건 없다고 적었습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위해 희생했기에 지금을 누리게 된다고 믿습니다.       


설거지를 마친 아내의 목에 땀이 흘렀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나는 요즘입니다. 땀을 닦는 아내가 한 마디 던집니다. "갱년기가 오려나." 덜컹했습니다. 사춘기와 갱년기 맞짱 뜨면 갱년기가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두 딸 중 하나가 사춘기입니다. 남은 한 놈도 사춘기에 들어가고 시기를 같이해 아내마저 갱년기가 찾아온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일 겁니다. 사춘기와 갱년기 사이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갱년기가 이긴다고 하니 아내의 편에 서는 게 맞을 겁니다. 나름 노선을 정확히 해놨기에 어제도 시키는 일과 알아서 해야 할 일을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아내의 칭찬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생색내 봐야 눈 밖에 날 뿐입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파업 없이 성실히 자리를 지켜줬습니다. 그 덕분에 두 딸도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저도 하고 싶은 일을 해올 수 있었습니다. 아내의 역할에 비해 그동안 제가 한 건 미약했습니다. 굵직한 사고만 안 쳤어도 아내를 덜 힘들게 했을 텐데요. 아내는 지나간 일에는 관대한 편인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망각하지 않게 한 번씩 꼬집어 주는 센스도 잊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보다 앞으로의 시간이 중요합니다. 서로에게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는 노력도 따라야 할 겁니다. 가정은 누구 한 사람의 노력으로 유지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싫은 건 상대방도 싫기 마련입니다. 그럴수록 스스로 알아서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거창하고 표가 나는 일이 아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한 행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불 빨래도 걷고 잘 개서 정리했고, 저녁 먹고 난 설거지도 했습니다. 아내 덕분에 새벽 시간을 얻었으니 저녁에라도 제 역할을 해내야겠습니다.      



2022. 07. 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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