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인데 계획은 있니?
없으면 이거라도 해볼래?

by 김형준

2022. 07. 20. 07:40



자발적 퇴사 이후 두세 달을 쉰 적 있습니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불편한 휴가였습니다. 한참 돈을 벌 나이에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으니 아내는 속이 탔을 겁니다. 의지는 강렬했지만 취업이 내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니 때를 기다릴 밖에요. 구직에 신경 쓰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갑니다. 재충전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못했던 걸 해보려고 하지만 막상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었습니다. 핑계를 대자면 마음의 여유가 없었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그 시간을 조금 더 가치 있고 밀도 있게 사용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중학교 1학년 큰딸이 성적표를 가져왔습니다. 방학했다고 신나 하면서요. 성적표도 세월만큼 이 많이 변했습니다. A4 두 장, 앞 뒤를 깨알 같은 글씨가 채워져 있습니다. 각 과목 담당 선생님의 평가가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점수로 등급을 매겼던 우리 때와는 달랐습니다. 한 글자씩 읽어보니 한 학기 동안 무엇을 배우고 어떤 태도로 임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다 읽고 제가 내린 평가는 대체로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평가 기준은 오롯이 제 자신입니다. 중학교 때 저와 비교하면 훨씬 나았습니다. 공부도, 친구관계도, 생활태도도 저보다는 나았습니다. 수고를 인정해주니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 틈을 노려 질문을 던졌습니다.


"방학인데 계획 있니?"

계획을 늘어놓습니다. 죄다 친구들과 어디 가겠다는 계획뿐입니다. 실컷 놀겠다는 의미입니다. 들어보니 한 달 용돈으로는 다 못할 것 같았습니다. 조용히 팩트를 날렸습니다. "너 돈 없잖아?" 큰딸도 잘 아는 것 같습니다. 몇 가지는 이미 포기했고 꼭 하고 싶은 것만 남겨두려 고민 중이었습니다. 물론 방학 동안 놀지만은 않을 겁니다. 영어, 수학, 미술 학원은 꾸준히 다닐 겁니다. 계획을 물어본 건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알고 싶었던 겁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으면 좋겠다고 한 마디 건넸습니다.


성적표에 국어에 대한 내용이 길고 구체적이었습니다. 큰딸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논술을 배웠습니다. 흔히 아는 그런 논술이 아니라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써보는 식이었습니다. 그때 글을 써본 경험 덕분인지 자기 생각을 글로 제법 표현했습니다. 제가 느낀 걸 담당 선생님도 똑같이 언급해주었습니다. 그러니 저도 욕심이 났습니다. 조금씩 틈틈이 꾸준히 글을 쓰면 앞으로 도움받을 일이 많을 거라며 운을 뗐습니다. 글 쓰는 능력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대입을 준비하며 논술에 많은 정성을 들이는 게 사실입니다. 짧은 시간 얻어지는 게 아니다 보니 좌절하는 이도 있습니다. 또 논술에 집중하면 다른 과목에 소홀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지금부터 조금씩 준비하면, 특별히 시간을 내서 하는 게 아니라 네가 원할 때 쓰고 싶은 만큼 쓰다 보면 자연히 능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그러면 논술 준비할 시간을 다른 곳에 투자할 수 있게 된다고 꼬시듯 말했습니다. 솔깃해하는 눈치였습니다. 지금은 이 말에 의미를 온전히 이해 못 할 수 있습니다. 속는 셈 치고 시키는 대로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직장인에게 휴가를 생명수나 다름없습니다. 쉬는 날을 위해 일주일을 버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직장인도 방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그 시간이 주어지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싶다고 합니다. 먹고사는 게 먼저이다 보니 포기하고 사는 게 많습니다. 그럴수록 시간에 대한 갈증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두 딸이 부러운 것 중 하나가 방학입니다. 공짜로 주어지는 것 같아 더 부럽습니다. 월급을 주면서 한 두 달 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디까지나 부모 입장에서 입니다. 아이들은 아직 모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그때 방학의 소중함을 몰랐으니까요. 그때 그걸 깨달았다면 아마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후회한 들 뭐하겠습니까.


다행인 건 방학에도 꾸준히 학원을 다닌다는 겁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가치 있는 활동은 하니 말입니다. 다만 더 욕심을 내자면 마음껏 놀고 남는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단하고 특별한 게 아니어도 좋습니다. 글쓰기처럼 평소에 할 수 있는 거면 좋겠습니다. 성과는 꾸준함에서 비롯됩니다. 당장에 표가 나지 않아도 조금씩 하다 보면 어느새 출중한 기량을 갖출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남들보다 탁월한 걸 갖고 있으면 나머지 시간을 또 다른 곳에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시간의 가치와 노력의 의미를 스스로 배워갔으면 좋겠습니다. 옆에 앉혀놓고 백 날 떠들어봐야 안 들어올 겁니다.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스며들게 꾸준히 잔소리 아닌 것 같은 잔소리로 세뇌를 시키려고 합니다. 본인도 모르게 엄마 아빠가 의도하는 걸 하고 있게 말이죠. 그래서 부모님 말을 듣길 잘했다고 깨닫는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2022. 07. 2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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