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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Sep 08. 2022

그깟 일에 흔들리는 사람이 있어? 네, 그게 저예요

2022. 09. 08.  07:33



인간의 상상력이 문명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합니다. 날고 싶은 상상이 비행기를 만들었고, 우주여행을 상상하며 왕복 우주선을 만들었고, 걸으며 컴퓨터를 하겠다는 상상이 스마트폰을 만들었습니다. 이밖에도 우리에게 안락한 삶을 살 게 해 준 수많은 것들이 상상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런 상상은 모두를 이롭게 했습니다. 반대로 상상할수록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상상은 결국 자신을 갉아먹을 뿐입니다.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에 집중도 못하게 만듭니다. 상상이 상상을 낳고 감정이 요동치면서 일상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다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애먼 감정과 시간을 낭비한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귀를 열지 않았지만 유난히 잘 들리는 단어가 있습니다. 몇 발 떨어진 자리에서 전화기로 대화 중 사직서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귀를 열고 듣고 있자니 얼마 전 현장에 배치된 직원이 사직서 양식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현장 그 업무를 처음 시작했던 게 저였습니다. 저를 대신해 온 직원이었습니다. 4개월 만에 그만두겠다는 거였습니다. 임무 교대를 하면서 속으로 다짐한 게 있습니다. 다시 그 현장으로 발령 내면 그만두겠다고 말할 작정이었습니다. 여러 문제가 얽혀 최근에서야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직원이 빠지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슬슬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사직서를 내겠다는 말은 사전에 전달되지 않았을 겁니다. 미리 상의하고 사표를 내는 경우는 드물 테니까요. 어떤 불만이 있는지 모르지만 참고 참다가 일방적으로 사직서를 내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제 본사 임원의 귀에 들어갑니다. 어렵게 구해 앉혀놓은 자리니 어르고 달래기를 시작할 겁니다. 말이 통하면 없던 일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사람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이미 떠날 각오를 한 사람에게는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대치만 하다가 결국 보내줍니다. 이제 대신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인사 담당자는 당장 누구를 보낼지 고민에 빠집니다. 직원이 하루아침에 구해지는 것도 아니니 우선 시간을 벌기 위해 다른 직원을 한 명씩 대입해 봅니다. 그러다 저에게 까지 생각이 미칩니다. 앞서 그 자리에 있었으니 다시 가도 별 문제는 없을 거라 여깁니다. 마음으로 낙점하고 이제 본인의 의사를 물으려 할 것입니다. 묻는다기보다 통보에 가깝습니다. 상황 설명을 하며 "회사 생각해서 네가 한 번만 애 좀 써줘라. 후임자 최대한 빨리 구해서 교체해 줄게." 머릿속이 바빠집니다. 이대로 그만두어야 하나? 한 번 더 속아줘야 하나? 문득 떠오르는 아내와 딸 얼굴에 결국 고개를 끄덕입니다. 


상상이 상상을 낳았습니다. 언제 나를 부를까 싶어 일도 손에 안 잡힙니다. 부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강하게 밀어붙일까? 싫다고 말하고 그만두겠다고 엄포를 놓을까? 내 자리를 지나칠 때면 가슴이 콩닥콩닥 거립니다.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나가고 들어오고를 반복합니다. 이미 감정도 격앙되었습니다. '내가 분명 안 가겠다고 말했는데 다시 보내겠다는 건 나를 우습게 본다는 의미일 거야', '나한테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해.' 상황을 상상하면 그 안에 내 감정까지 상상합니다. 감정을 상상하니 행동도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감정으로 사람을 대하니 하나부터 열 까지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내색은 못했지만 온종일 기분이 바닥을 기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상상했던 것 중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퇴근하는 데 찝찝했습니다. '나 하루 종일 뭐했지?' 한심했습니다. 수백 권을 읽고, 수백 편의 글을 쓰면서 나를 다스리려 노력했지만 아니었나 봅니다. 우연히 들은 '사직서'한 마디에 하루 종일 정신을 놓았습니다. 상상만으로 하루를 채웠습니다. 쓸데없는 상상이었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왜 나는 그 상황에서 의연하지 못했을까? 발을 빼면 분명 다르게 볼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한 번 담근 발을 스스로 더 밀어 넣었습니다.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결국 타의에 의해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감정이 요동칠 때 발을 빼고 멀리서 바라보라고 조언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이미 감정에 흔들린 사람은 쉽게 이성을 되찾지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거나 걱정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상상하고 걱정하는 일은 실제로 일어나야 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신기루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상상에 사로잡혀 감정이 휘둘리고 맙니다. 법구경에는 '생각은 말로 나타나고, 말은 행동으로 나타나며, 행동은 습관으로 발전하며 습관이 굳어지면 성격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상상은 감정으로 나타나고, 감정은 행동으로 나타나며, 행동은 습관으로 발전하며 습관이 굳어지면 성격이 된다'라고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상상이 감정으로 바꾸고 감정이 행동을 바꾸고 바뀐 행동이 습관이 되면 성격도 같이 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에너지를 낭비할 게 아니라, '지금'에 집중하는 게 쓸데없는 상상도 없애는 보다 현명한 처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깟 일에 흔들리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2022. 09. 08.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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