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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Oct 05. 2022

그때는 맞고 지금은 '다르다'

2022. 10. 05.  07:34



단골 카페 지정석에 앉았습니다. 글 첫머리를 떠올리는 중에 머리 위 전등이 깜빡입니다. 며칠 전부터 그랬습니다. 몇 번을 깜빡이더니 다시 멀쩡합니다. 놔두면 머지않아 제 역할을 못 할 것 같습니다. 수명이 다한 전구는 교체해주는 게 맞습니다. 다 쓴 물건은 버려야 또 새로 살 수 있는 법이고요. 쓰지도 않는 물건에 유난히 집착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 딸이 그렇습니다. 자기 손이 탄 물건은 웬만하면 버리지 못하게 합니다. 혼자 쓸 수 있게 방을 꾸며주고 싶어도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물건 때문에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손때 묻은 것들에 애정이 가서일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가 되면 지금과는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때는 맞고 지금이 틀렸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작가의 서랍에 마무리짓지 못한 글이 십여 편 쌓였습니다. 대부분 쓰다가 막힌 글입니다. 쥐어짜도 이어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아 화면을 덮고 서랍 속에 고이 간직해 둔 글입니다. 화면을 닫을 때 늘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쓸 말이 생각나면 그때 다시 꺼내자' 몇 개월 아니 1년이 지나도 눈길조차 안 줄 글이 전부다입니다. 오히려 작가의 서랍이 아니라 쓰레기통이 된 것 같습니다. 다 쓰고 버린, 쓰다 말고 싫증 나서 버린 것들을 받아내는 쓰레기통인 것처럼요. 어쩌다 쓰레기통이 되었을까요?


작정하고 한 편을 쓰겠다고 덤빕니다. 생각이 잘 풀리는 날은 술술 써집니다. 분량도 제법 나옵니다. 마침표를 찍고 나면 홀가분, 뿌듯, 어깨으쓱입니다. 오늘만 같으면 글 쓰는 게 일도 아니라고 뽕이 잔득듭니다. 반대인 날도 당연히 있습니다. 마침표는 어디에 있는 거니. 어디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말은 말이 되어 날뛰기만 합니다. 도무지 글로 잡히지 않습니다. 내뜻대로 되지 않는 글에 기분은 아메리카노처럼 까매졌습니다. 어제의 당당함은 이미 사렸습니다. 어깨 위에는 100킬로그램짜리 덤벨이 올려져 있습니다. 땅으로 땅으로 꺼져갑니다. 글이 안 써지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말이죠. 하지만 잘 써진 그날 그 느낌에 중독이 되면 안 써지는 날의 자신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힘이 빠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쓰다만 글을 다시 쓰려고 하면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막막합니다. 처음 쓸 때의 생각이 지금 보면 이해 안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내가 그때 그랬나?', '왜 이렇게 생각했지?' 그때의 나는 이미 지난 간 버스처럼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때의 나는 그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당시는 그 생각이 맞았고 그 생각대로 글을 쓰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지 못한다는 말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게 사람입니다. 1초 전과 지금 자신은 다른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어제의 내가 오늘 내가 아니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제의 나와 다른 오늘의 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쓰다만 글은 그때의 내가 쓴 글로 인정하면 그만입니다. 만약 다시 써야 한다면 지금의 내가 새로운 글을 쓰면 됩니다. 퇴고를 하다 보면 전혀 새로운 글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 끝내지 못한 글이 쌓인다고 자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때는 그때의 내가 맞고, 지금은 그때와 다른 내가 존재할 뿐입니다. '다르다'와 '틀리다'의 의미는 다릅니다. 내가 나를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접근하면 서랍 속 글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나를 같다, 다르다의 기준으로 보면 서랍 속 글은 사진 속에 담기 내 모습처럼 귀하게 간직될 것입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한 편씩 마무리 짓는 습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 편의 글을 써내는 것도 도전-성취의 과정이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 삶도 내가 바라는 대로 살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인생은 매 순간 도전과 성취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다행히 오늘도 이렇게 써내면 서랍 속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취하며 시작한 오늘 하루도 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어봅니다. 


2022. 10. 0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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