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03. 07:41
제임스 본드가 상대하는 악당은 조직적이고 규모도 상당하다. 보스의 명령에 따라 지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들 나름의 조직 체계를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 조직을 홀로 상대해 정의 지키는 모습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악당이 악랄할수록 주인공이 더 돋보이기 마련이니 말이다.
영업과는 거리가 먼 업무를 해왔다. 우리가 아는 영업은 발로 뛰며 사람을 만나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계약까지 이루어지는 거로 안다. 일반 기업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국가, 지자체에서 발주하는 공사는 조달 시스템을 통해 공고와 계약, 준공까지 이루어진다. 그러니 발로 뛸 필요도 없고 사람을 만나 설명하고 설득할 필요도 없다. 단지 정해진 규칙대로 회사의 역량에 맞게 원하는 공사에 입찰하면 그만이다. 수십, 수백 개의 회사와 보이지 않는 경쟁을 거쳐 가장 적은 금액을 써낸 회사에게 계약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게 몇 건의 공사를 앉아서 수주했던 적이 있었다. 계약하고 일해주고 돈만 받으면 좋겠지만 그 과정은 말 그대로 험난 했다.
지자체에서 발주하는 공사를 처음 수주했었다. 모든 게 생소했다. 계약서를 주고받는 과정, 서류 꾸미고 제출하는 방법,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 준공 시 필요한 절차 등 모든 게 낯설었다. 그렇다고 마흔이 넘어서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었다. 맨땅에 헤딩하듯 하나씩 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 같은 초짜를 상대하는 공무원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거다. 그래서 그들은 이왕이면 같이 일을 했던 업체가 낙찰받기는 내심 바란다고 한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규칙과 절차가 있다. 또 공무원 조직은 업무에 필요한 모든 게 매뉴얼화되어 있다. 정해진 매뉴얼대로만 하는 게 공무원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융통성이 부족한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닌가 싶다.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볼 수 없어서 부족한 건 내 나름 준비해서 담당 공무원을 찾는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준비한 내용은 어김없이 반려된다. 내 입장에서는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해줬으면 하고 읍소해 보지만 그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예외를 인정하면 그로 인한 모든 문제는 담당 공무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원칙만 지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걸 굳이 사서 모험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업무 파악을 제대로 못한 나는 손발이 힘들다. 그럴수록 더 그들을 원망하게 된 것 같다. 예외를 인정해주지 않는 그들의 태도를 내 딴에는 갑질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랬던 나도 지난 5년 동안 공무원을 더 자주 상대해왔다. 자주 부딪히다 보니 그들의 생리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다. 간혹 고압적으로 대놓고 갑질을 하는 이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원칙대로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비치는 태도라고 이해한다. 일반 기업과 공무원 조직의 체계가 다른 데서 오는 차이라고 생각한다. 다르다는 데서 오는 차이일 뿐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악당은 잘못된 일을 해서 정의 심판을 받지만, 공무원은 원칙을 지키는 것이니 조용히 따르는 수밖에. 그러니 갑질은 아닌 걸로.
2022. 11. 03. 0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