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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Dec 03. 2022

91일간의 기다림

2022. 12. 03.  07:13


곰이었던 웅녀는 100일 동안 마늘과 쑥으로 버텼다. 그녀를 100일이 넘게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서 버틸 수 있게 했던 것 무엇이었을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은 캄캄한 동굴에서 마늘과 쑥만 먹고 버텨내게 할 만큼 확신이 있었을까? 아마 셀 수 없이 많은 순간 의심이 들었을 테다. 시시때때로 포기하고 싶었을 거다. 짐작컨데 호랑이와 곰은 믿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을 것 같다. 끝까지 견디지 못한 호랑이는 100일을 목표로 했고, 반대로 곰은 오늘을 버텨내는 게 목표였을 거로 생각한다. 


탈고 후 한 달여 만에 책이 나왔다. 내 책이 서점 평대에 올라있는 걸 보는 게 신기했다. 신기한 한편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내 책을 선택할지 막연했다. 나도 서점에 가면 처음 보는 작가의 책에는 시선을 덜 주니 말이다. 출판사대로 홍보를 했지만 나도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인터넷을 뒤지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청년지원센터' 홈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주소를 그러모았다. 100여 곳이 추려졌다. 책을 담을 택배 봉투를 사고 동봉할 편지를 적었다. 큰딸의 도움을 받아 100여 곳에 보낼 택배 포장을 마쳤다. 빠른 등기는 안전하게 보낼 수 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일반소포는 긴 여정과 수신 확인 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다. 느려도 안전하게 도착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장한 일반소포를 선택했다. 사흘 뒤 여주 청년센터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보내 준 책을 잘 받았다는 인사와 강연 기회가 있으면 연락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반송된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안전하게 전달되었다고 믿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아니, 다른 형태로 나를 알릴 방법도 있지만 우선은 연락이 오길 기다려 보기로 했다.


여름휴가철이 끝나면 기업이나 관공서는 하반기 일정이 시작된다. 대개는 년 초나 전년도 말에 1년 간 일정을 세우는 게 보통이다. 일정은 정해져 있지만 사람 사이 일에는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길 수 있을 터다. 그런 우연을 바라고 또 다른 곳에 책을 보내기로 했다. 서울시 내 각 구청 교육 담당자 주소를 검색했다. 구청 홈페이지에 주소를 비롯해 담당자 이름과 유선전화까지 확인이 가능하다. 그렇게 구청을 비롯한 40여 곳에 보낼 편지가 담긴 택배 포장을 마쳤다. 이번에도 일반소포를 선택했다. 마음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안전하고 깨끗하게 담당자의 손에 전해지길 바랐다. 손에 든 책과 편지에서 나의 마음도 묻어나길 바라면서 말이다. 며칠, 몇 주,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한 곳도 연락이 없었다. 그럴 수 있다. 연락은 없었지만 적어도 40여 곳의 교육 담당자는 책 제목과 내 이름은 알았을 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건설업에 몸 담은 지 20년 째다. 건설업은 대개 현장 단위로 운영된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하기까지의 기간이 그 사람의 경력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어느 현장에서 어떤 업무를 담당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전문성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이를 위해 건설기술인협회는 개개인의 담당 업무와 기간, 기여도 등을 기록하고 인증해주는 관리 업무를 전담하는 공공기관이다. 재취업자에게는 기술인협회가 발급하는 경력증명서가 이력서를 대신하는 공신력을 갖고 있다. 경력관리는 물론 취업 지원과 전문 교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비스도 받을 수 있는 기관이다. 한 마디로 건설기술인이 되려면 협회 회원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그렇게 관리하는 기술인인 60만 명 이상이다. 협회 활동, 기술 정보, 교육 프로그램 등이 담긴 협회지를 매달 받아봤다. 이거다 싶었다. 발행을 담당하는 홍보팀으로 책을 보내기로 했다. 책에 사인을 하고 편지를 적어 함께 보냈다. 이번에는 빠른 등기로 보냈다. 빨라도 정성은 빼놓지 않았다. 홍보팀에서 책을 받았다는 알림 문자를 받았고 그렇게 다시 기다림이 시작됐다.


'건설기술인 협회 홍보팀장입니다.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협회지 신간 안내토록 하겠습니다.'

이틀 뒤 받은 문자의 내용이다. 어리둥절했다. 이렇게 빨리 그것도 바랐던 답과 함께 말이다. 침착할 수 없었지만 침착하게 최대한 예의를 갖춰 회신 문자를 보냈다. 언제 발행되는지 묻지 못했다.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내 책을 소개해 주겠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언제 발행되냐고 묻는 건 내 딴에 월권이지 싶었다. 그저 그네들의 일정에 따라 기다리는 게 내 일일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문자를 받은 게 지난 8월 31일이었고, 또 다른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 나는 매일 내가 할 일을 했다. 매일 같은 시간 일어나 일기 쓰고 원고 쓰고 브런치나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신간이라고 했으니 9월 말에 발행될 거로 생각했다. 한 달 만 기다리면 된다고 믿었다. 한 달 동안 내가 할 일을 반복했다. 9월 말이 되었지만 협회지 발행 소식은 없었다. 속이 탔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그때 안 사실은 코로나로 인해 발행 간격이 일정치 않았다는 거다. 홍보팀에서도 협회지 발행 일정을 정확한 못 박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혹자는 전화로 물어볼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기다리는 게 내가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해 안 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조금은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한 사람이니 말이다. 그렇게 10월도 지났고 11월에 들어섰다. 끝까지 참아보려고 했지만 결국 먼저 전화했다. 홍보팀장 말고 주무관에게 신분을 밝히지 않고 발행일이 언제인지만 물었다. 11월 30일이라고 한다. 얼마 안 남았다. 그래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10월, 11월도 매일 같은 일상을 보냈다. 그리고 11월 30일, 기술인협회 홈페이지를 통해 겨울호 매거진이 발행되었다. 마주한 화면에서 한 페이지씩 넘겼다. 마우스를 쥔 손이 조금씩 떨렸다. 다음 페이지 화살표를 클릭할수록 손가락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주했다. 사무실 내 자리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숨죽여 들뜬 나를 아무도 알리 없었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91일의 기다림 끝에 내 책을 알릴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갖게 되었다. 


곰이었던 웅녀는 100일의 기다림 끝에 인간이 되었다. 앞도 잘 안 보이는 동굴 안에서 마늘과 쑥만으로 매일을 보냈다. 아마도 아침저녁 구분도 없는 하루를 그저 먼 허공만 바라보며 막연한 기다림을 이어갔을 것이다. 한 달 뒤 삼 개월 뒤를 생각했다면 호랑이처럼 포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오늘만 버틴다는 심정으로 하루를 보내면 덜 힘들 수 있다. 내가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해가 짧아지고 외투를 꺼내 입는 일상으로 변해있었다. 내 주변의 모든 게 매일 조금씩 모습을 달리했지만 나는 나의 일상을 지켰다. 오늘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어쩌면 내 책이 소개되는 건 그리 대단한 게 아닐 수 있다. 그저 누군가에겐 종이 한 장 넘기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눈길이 머물고 소개글을 읽고 책 까지 사서 읽으며 다른 변화의 시작이 될 수도 있을 테다. 


그저 지나치는 순간도, 누군가의 삶을 흔들어 놓는 일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책을 정성껏 보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리고 그저 기다리는 게 전부다. 그리고 또 다른 어딘가에 나를 알리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다. 나를 알리는 건 내가 할 수 있지만 나를 선택하고 내 책을 읽는 건 오롯이 그들의 몫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고 해내야 하는 걸 하는 것이다. 그런 날이 한 주 한 달 일 년이 쌓여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 준다. 그러니 나는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게 바라는 내가 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믿는다. 곰은 아마도 이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2022. 12. 03.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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