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08. 07:35
채윤이 밥을 다 먹고 머리를 혼자 감겠다고 했다. 태권도장에서 땀을 많이 흘렸는지 머리가 반들반들했다. 9시 전에 감으면 머리를 말려주겠다고 했다. 아빠도 9시부터 수업을 들어야 하니 서둘렀으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내 말을 듣지 않을 걸 안다.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하기 전 채윤타임이 있다. 적어도 30분 이상 소화를 시킨 뒤 의식을 치른다. 그러니 내버려 두고 나는 내 할 일을 했다. 9시, 나는 수업을 채윤이는 TV를 보고 있다. 두어 번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욕실로 들어간다. 어쩐 일인지 머리 감고 샤워까지 하고 나온다. 이제는 잔소리 안 해도 알아서 하려나보다. 다 씻고 나올 즘 보민이가 들어왔다. 저녁밥 차려줄까 물으니 학원 가지 전 마라탕을 먹었단다. 다행이다. 밥상 한 번 안 차리는 게 이렇게 편한 줄 이전엔 몰랐다. 쉬는 시간 나는 설거지를 했다. 보민이는 과제를 하고 있었다. 채윤이는 젖은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리고 있었다. 드라이기 사용이 익숙지 않아 보여 대신 머리를 말려줬다. 샤워에 머리까지 감아서 몸이 나른했는지 일찍 잠자리에 든 채윤이. 거실에는 보민이와 나만 남았다. 나는 강의를 들었고, 보민이는 숙제를 하고 있었다.
숙제를 다 했는지 스마트폰에 시선이 옮겨가 있었다. 보민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전날 간절히 바랐던 넷플릭스를 보고 싶은 이유가 궁금했다. 내 딴에는 꿈과 연관이 있을 거로 짐작했었다. 짐작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보민이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수업 시간에 본 외국 드라마가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보고 싶기도 하고, 그걸 보면서 영어 공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한 번 더 물었다. 디즈니 플러스에 방영 중인 '모던 패밀리'를 재미있게 봐서 나머지 이야기가 궁금하단다. 나를 납득시킬 대답은 아니었다. 궁금했던 대답을 들었으니 내 생각을 말할 차례였다.
"아빠는 네가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학교, 학원 과제도 빼놓지 않고 잘하고 있어서 크게 걱정은 안 해. 문제는 학년이 올라갔을 때라고 생각해. 그때가 되면 분명 지금보다 더 바쁘고 시간도 부족할 거야. 학교 공부와 학원에 빼앗기는 시간이 지금보다 더 많을 거고. 그래서 지금보다 시간을 조금만 더 아껴 쓰는 습관을 들였으면 해서. 넷플릭스까지 보면 아마도 정작 중요한 걸 할 수 있는 시간이 모자를 수도 있을 것 같거든. 지금부터 조금씩 습관을 들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네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면 아빠도 기꺼이 너를 믿고 엄마도 설득해 줄 수 있다."
덜 잔소리처름 들리려고 최대한 자제하며 말했다. 말하는 내내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내 말에 수긍하는 눈치였다. 보민이도 시간 관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뜸 책은 읽어야겠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적성 검사 질문을 이해하기 힘들었단다.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단다.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아빠가 전에도 말했었지, 시험을 잘 보려면 문제를 이해하는 문해력이 꼭 필요하다고. 문해력을 키우는 가장 쉬운 방법이 책 읽는 거고.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읽도록해봐."
모처럼 대동 단결되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책 읽으라고 한 두 번 말은 했지만 늘 같은 반응이었다. 알았다는 대답뿐 읽는 모습을 못 봤다. 이번에는 기대가 된다. 스스로 필요성을 느꼈으니 분명 다를 테니 말이다. 내심 책만 꾸준히 읽어준다면 넷플릭스도 얼마든 보여줄 수 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SNS에 빠지든, 미드에 중독되든 적어도 책만 꾸준히 읽어도 남는 게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오히려 책을 꾸준히 읽으면 소비자에서 생산자가 될 수 있는 방법도 스스로 터득하게 될 거로 믿는다. 많은 사례가 이미 입증했으니 말이다.
10여 분동 안 이어진 대화에서 나는 보민이를 믿어보기로 했다. 아내를 설득해야 하는 과정이 남았지만, 불가능하지 아닐 테다. 아빠가 자신을 믿는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면 분명 보민이 태도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부모라면 아이를 믿어주는 게 당연하다. 뜬구름 잡는 장황한 잔소리보다 어쩌면 믿음을 보여주는 행동이 부녀관계가 나아질 수 있다. 보민이도 이런 나의 믿음에 반드시 보답할 거로 우선 믿어보기로 했다. 의욕과 걱정만 담긴 잔소리는, 수위를 조절하는 게 자녀와의 관계가 나아지는 또 다른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022. 12. 08. 0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