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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합니다

by 김형준

2022. 12. 22. 07:35


내 인생에도 행복은 피었다.

행복은 정의하기 나름이다. 서울역 노숙자도, 은퇴를 앞둔 직장인도, 취업을 준비하는 무직자도 행복할 수 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노숙자도 은퇴자도 무직자도 마음먹기에 따라 불행할 수도 있다. 알면서도 잘 되지 않는 게 행복을 인정하는 태도인 것 같다. 행복과 불행이 동전 던지기로 정해지는 거라면 오히려 쉬울 수 있다. 그렇지 않기에 행복을 갈망하고 불행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지금이 좋고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시간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이 행복하다는 걸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그때도 행복은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옷도 양껏 샀다. 하는 일이 불안해도 삼겹살에 소주 한잔 마시는 그 순간이 좋았다. 반려자를 만나고 꼬물대는 아이가 눈앞에 있을 땐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감동이었다. 하지만 유난히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곳이 있었다. 일이 그랬다.


서른 살에 첫 직장을 가졌다. 전공과 달랐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렇다고 전공이 적성에 맞았다고 할 수 없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면 모를까 그때는 생계가 먼저였다. 그때는 그렇게 시작하는 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게 맞는 말일테다. 결과보다 당장 월급이 중요했다. 그래야 빚도 갚고 학교도 다니고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고른다는 건 없어도 그만인 사치품과 같았다. 애착이 없었다. 전공과 다르다고 선을 그어놓으니 마치 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언제든 전공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던 것 같다. 중력이 작용하는 모든 물체는 땅으로 떨어지기 마련이다. 인공위성이 지구를 돌 수 있는 건 그 사이 무중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과 나 사이에도 무중력이 존재했던 것 같다.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내 일이 아닌 듯 바라만 봤다. 그러니 일을 잘한다는 말도,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길 역량도 갖기 못한 채 언제든 떠날 준비만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 결과가 9번의 이직이었다.


서른 살에 시작한 지금 일을 17년째 이어오고 있다. 그중 13년을 겉돌았다. 아니, 여전히 같은 일을 하면서 겉돌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30대에 나는 애착이 없어서 일을 잘하고 싶지 않았다. 40대가 되고는 이제와 일을 배워 뭐 하겠냐고 생각했다. 이래 저래 핑계만 대고 일을 일 답게 대하지 않았다. 그러니 늘 같은 실수를 반복했고 여전히 시키는 일만 하고 있다. 마흔셋,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일찍이 의문이 들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때라도 나에게 질문을 해서 다행이다. 그때 질문을 시작한 덕분에 마흔일곱의 나는 일과 함께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함께 해내고 있다. 그래서 행복하다.


서른 살의 나와 마흔일곱의 나는 똑같은 24시간을 살고 있다. 여전히 같은 업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딱 하나 다른 건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이다. 직장을 다니며 두 가지를 한다는 게 누군가는 엄두가 안 난다고 할 수 있다. 결과만 말하면 안 해봐서 그런 것 같다. 나도 해보기 전에는 같은 생각이었다. 두 번 생각 안 하고 시작했고 하다 보니 4년째 매일 읽고 쓰기를 반복해오고 있다. 단지 읽고 쓴다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앞에도 적었듯 읽고 쓰는 게 수많은 질문을 통해 얻은 답이기 때문이다. 지금 다니는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남은 인생을 책임져줄 직업으로 선택해서다. 돌이켜보면 직장은 다니고 있었지만 내 직업이라고 당당하게 내세우지는 못했던 것 같다. 서른 살부터 직업으로써 당당했다면 아마 지금처럼 살지 않았을 수 있다. 내 일에 자부심을 갖고 더 깊이 배우려고 했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 것 같다. 하지만 마흔셋부터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했고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나 자신이 대견하고 매일 반복을 통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지루한 반복이지만 내 일을 갖게 된다는 믿음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내 또래 직장인이라면 같은 고민을 할 것 같다. 2,30대도 다르지 않을 거로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은 있지만 먹고사는 게 걸려 선뜻 못하는 사람이 많다. 용기를 내서 박차고 나갈 수도 있다. 아니면 지금에 만족하고 그 안에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 옳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행복은 정의하기 나름이라고 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행복할 것 같다면 그러면 된다. 용기를 내는 게 두렵다면 그 안에서 행복을 만끽하면 된다. 어느 누구도 각자의 선택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나도 지금이 만족스럽고 행복한 건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오롯이 내가 원해서 이 길에 들어섰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행복하다. 직장을 다니며 여러 일을 시도하고 해내고 있지만 내 선택이기에 지금껏 해올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해낼 것이고. 그래서 나는 지금도 좋고 앞으로의 나도 기대된다. 지난 시간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걸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2022. 12. 22.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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