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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Dec 28. 2022

부모를 웃게 만드는 것

2022. 12. 28.  07:36


자식이 부모를 웃게 만드는 일은 무엇일까요? 갓난아기 때의 해맑은 표정, 말을 배우면서 내뱉는 옹알이, 작은 키로 돕겠다며 까치발을 드는 모습, 삐뚤빼뚤 글씨로 사랑한다고 쓴 편지, 음정 박자를 무시하고 어설픈 몸짓으로 춤추고 노래 부르는 모습일 겁니다. 또 크면서는 부모 말 잘 듣고 사고 치지 않고 제 할 일 알아서 하는 것도 있고요. 빠듯한 월급으로 입히고 먹이고 공부시키는 목적은 제 역할하는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하길 바라서 일 테 고요. 무엇보다 공부를 잘해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방학 중에도 유치원 일로 늦은 시간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공손하게 받는 걸로 봐서는 일 때문에 연락이 온 것 같습니다. 3분 정도 통화를 마친 뒤 큰딸을 찾습니다. "보민이가 레벨 테스트 1등 했다는데." 본인이 더 놀라는 눈치입니다. 별 기대 안 하고 있었다고 앞전에 말했었습니다. 테스트 보면서 잠깐 졸았다고까지 했었거든요. 그러고도 1등? 저도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정신 차리고 풀었으면 어쩔뻔했니." 자식이 1등 했다는 소식이 이렇게 기분 좋은 건지 처음 알았습니다. 늘 학원 가기 싫다고, 학원 과제 때문에 온갖 짜증은 다 내던 아이였습니다. 싫으면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을 말했었고요. 그래도 기어이 가겠다는 데 굳이 말리지 않았습니다. 무심한 듯 열심히 다녔던 것 같습니다. 


1등과는 거리가 먼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통틀어 가장 성적이 좋았던 게 11등으로 기억합니다. 딱 한 번이었죠. 평균 20등 사이를 오갔던 것 같습니다. 성적도 고만고만했고 문제를 일으킨 적도 거의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불려 온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아니 딱 한 번 있었습니다. 학교로 불려 간 건 아니고 파출소에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던 적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을 앞둔 겨울 방학. 임시 소집일이었습니다. 집에만 있기 무료할 것 같아 학교에서 배려해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는 아주 좋은 제도였습니다. 학교에 와도 딱히 할 일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담임 선생님께 눈도장 찍고 짧게 설교 한 마디 듣고 학교를 나서면 10시 남짓이었습니다. 오랜만에 회합이니 당구장을 안 갈 수 없습니다. 이른 시간 당구장을 전세 내고 삼삼오오 모여 게임에 열중합니다. 그때는 당구가 청소년 유해 스포츠였습니다. 한 마디로 불법이었죠. 당구장 주인은 사복을 입고 오면 모른 척 눈감아 주었습니다. 학기 중에도 당구장을 가기 위해 사복을 챙겨 다니는 열정은 기본 장착했었고요. 

그날도 여유롭게 게임이 끝나 당구대에서 연습 중이었습니다. 아직 경기가 한참인 친구도 있었고요. 평화롭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경찰이 올라온다는 말에 소지품을 챙길 사이도 없이 화장실로 뒷 문으로 당구대 밑으로 또 누구는 일행이 아닌척 옆 당구대에서 태연히 연습 했습니다. 숨는다고 가려질 덩치도 아니고, 일행이 아닌척 한 친구도 먼저 잡힌 일행 중 신고정신(?)이 투철한 누군가에 의해 걸리고 맙니다. 결국 굴비 엮듯 줄줄이 손에 손잡고 파출소로 끌려갔습니다. 여기저기로 흩어져 반성문을 썼습니다. 반성문만 쓰면 끝날 줄 알았습니다. 방학이었고 초범(?)이니 훈방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웬걸요, 열댓 명 중 저희 집에만 전화를 걸었습니다. 때마침 아버지가 계셨고 학교에 간 아들이 파출소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십니다. 사고 한 번 제대로 쳤습니다. 그동안 얌전히 범생이처럼 학교 집만 오간 줄 알았던 막내아들이 당구장이라. 

파출소를 나와 집으로 갔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가 외출하길 바라면서요. 기대는 기대일 뿐이었습니다. 잔뜩 겁먹고 집에 들어갔습니다. 나를 본 아버지는 별말씀 없었습니다. 혼을 내지도, 잔소리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한 마디 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게는 별 일 아니었나 봅니다. 저에게도 별 일 일어나지 않았네요.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을 나와 안정된 직장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잦은 이직으로 2,30대는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마흔이 넘어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무던했던 학창 시절을 보내고 무난한 직장 생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사회에서도 1등과는 거리가 멀지만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은 찾았습니다. 늦었지만 제 앞길 알아서 잘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알아서 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지금이라도 이런 모습 보여줄 수 있어 다행입니다.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니 말입니다. 아버지에게 보여줄 수는 없게 되었지만, 곁에 계신 어머니에게는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이가 적든 많든 한 번 자식은 평생 자식입니다. 나이 들어도 자식이 부모를 웃게 만드는 건 제 앞가림 잘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살갑고 재롱도 부리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머네요. 대신 제 앞가림 잘하고 자식 잘 키우는 걸로 대신하렵니다.   


부모가 되어서야 자식의 도리를 이해합니다. 일찍 알았다면 더 자주 기쁘게 해 드릴 수도 있었을 텐데요. 못하고 아쉬운 건 그것대로 남겨 두렵니다. 천지개벽하듯 달라질 일도 요원합니다. 어쩌면 어머니는 살던 대로 알아서 잘 사는 걸 바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제 아이들이 건강하게 제 앞가림하며 살길 바라는 것과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잘 살아보려고 합니다. 나는 물론 어머니와 두 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요. 


2022. 12. 28.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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