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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Dec 18. 2022

저마다 때가 있기 마련이다

2022. 12. 18.  07:35


온탕에서 불린 때가 잘 밀리면 기분도 좋아집니다. 때수건으로 미는 족족 면발이 되어 떨어져 나가는 걸 보면 희열도 느낍니다. 묵은 때를 빼면 몸도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때 빼면 광이 나듯 사람 사이 일도 때를 잘 맞추면 효율도 생기도 기분도 좋아지고 관계에도 윤이 나는 것 같습니다. 어디 사람 사이뿐일까요. 때를 잘 맞춰 읽은 한 권의 책은 삶을 변화시키는 출발선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저마다 때'가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금요일 저녁 아내 대신 저녁을 준비합니다. 1시간 정도 늦은 귀가로 손이 바쁩니다. 둘째는 태권도, 큰딸은 영어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입니다. 밥부터 찾을 걸 알기에 냉장고 속 재료를 그러모아 볶음밥을 만들었습니다. 다진 재료를 파 기름에 볶고 진간장을 불에 눌러 향을 냅니다. 양념이 된 재료에 남은 밥을 넣고 센 불에 볶아냅니다. 다 볶아질 즈음 둘째가 들어옵니다. 때를 같이해 큰딸이 DM을 보냅니다. '아빠, 데리러 올 수 있어?' 단어를 외워가지 않아 재시험을 봤다며 학원 버스를 놓쳤답니다. 끝나는 시간까지 20분 정도 여유가 있습니다. 둘째와 제 밥을 덜어 냉장고 반찬과 먼저 먹었습니다. 반 정도 먹으니 또 DM이 옵니다. '아빠, 나 끝났는데......' 남은 밥을 마시듯 입에 밀어 넣고 바지만 갈아입고 나섭니다. 어쩜 이리 때를 못 맞추니. 


5분 만에 학원 앞에 도착했습니다. 큰딸은 10분 정도 기다렸습니다. 때를 못 맞춘 것 치고는 많이 안 기다린 것 같습니다. 옆자리에 앉으며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내일 토요일이니까 넷플릭스 봐도 되지?" 평일에는 안 보기로 약속했고, 약속한 대로 지켰으니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수행평가를 잘 못 봤다고 합니다. 원인이 무엇인지도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큰딸이 내린 결론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선뜻 책에 손이 안 간다고 합니다. 읽다가 그만두는 게 걱정이랍니다. 그럴 바엔 안 읽는 게 낫지 않냐고 되묻습니다. 저도 맞장구쳤습니다. "맞아, 조급하게 읽을 필요 없어. 네가 읽고 싶어질 때 읽어야 제대로 읽게 될 거야." 책을 읽는 것도 다 때가 있다는 의미에서 한 말입니다. 그때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말을 먼저 꺼낸다는 게 조금씩 마음이 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 마음이 움직여 책을 손에 잡으면 그때가 출발선이 될 테니까요.

 

토요일 오후, 하릴없이 TV만 보고 있습니다.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기장판의 뜨끈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몇 시간을 TV만 본 게 미안했는지 눈이 책장으로 향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책 제목이 있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유시민 작가의 책입니다. 국가가 무엇인지 요즘 들어 생각이 많아집니다. 국민, 국가, 정부, 통치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을까 싶어 꺼내 들었습니다. 뒤표지에 붙은 중고서점 스티커에 2019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놓은 지 좀 된 건 알았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동안 눈으로만 보다가 이제야 꺼내 들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요즘 같은 때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읽어보니 제 때 꺼내 든 것 같습니다. 백성의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한 홉스의 사상, 국가는 최소한의 역할만 해야 한다는 밀의 공리주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 중 지금 우리는 어떤 이념의 국가인지 대입해 봅니다. 답은 아직 찾는 중입니다. 


세상사는 물론 저마다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덕망 높은 왕 덕분에 백성은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제 때 책을 잡은 누군가는 삶을 변화시킬 출발선에 섭니다. 어려운 시기 귀인을 만난 덕분에 인생이 술술 풀리는 이도 있습니다. 조급해하고 아등바등 살아도 세상만사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를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우연히, 운명 같은 만남은 때를 정하고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3년 만에 꺼내 든 책에서 지금 우리 사회가 어느 때인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인스타와 틱톡, 넷플릭스를 좋아하는 큰딸은 책 읽을 때를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알맞은 때 책을 읽게 되는 것도, 큰딸처럼 아직 책 읽을 때가 아닌 것도 억지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저 순리대로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동하고 몸이 움직여지는 '때'가 올 것입니다. 다만 그때를 놓치지 않도록 나와 내 주변을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태도가 필요하지 싶습니다.  


2022. 12. 1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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