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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an 14. 2023

몰스킨 노트에 가치를 입힌 10분 글쓰기

2023. 01. 14.  06:53


산에 오르기 전 정상을 바라보면 막막합니다. 저기까지 언제 가지? 갈 수는 있을까? 괜히 간다고 했나? 오만 가지 생각이 나도 '낙장불입' 출발선에 선 이상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땅만 보고 걷다 보면 어느새 중턱입니다. 한숨 돌리며 주변 경치도 감상합니다. 가방에 오이, 초코바, 물로 떨어진 기운을 보충합니다. 몸의 체온이 떨어지기 전에 다시 출발합니다. 오를수록 길은 가파릅니다. 두 발로 시작했지만, 네 발이 되어갑니다. 옆 사람의 응원을 받으며 기어코 정상에 딛습니다. 발아래 세상을 두니 모든 걸 다 가진 기분입니다. 이 맛에 산에 오르는구나! 내 몸 하나도 힘들 지경에 기어이 짊어지고 온 컵라면과 보온병을 꺼냅니다. 한 젓가락에 경치 한 번, 신선놀음이 따로 없습니다. 이 맛에 산을 찾는 사람 적지 않을 겁니다. 오르는 내내 죽을 맛이었지만,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 맛은 죽여줍니다.


몰스킨 노트를 좋아합니다. 속지는 일반 노트와 다를 것 없지만 점잖게 튀는 표지색, 비밀을 지켜줄 것 같은 밴드가 마음에 듭니다. 조금 고가이지만 나를 기록하는 데 가치를 두고 과감히 투자했습니다. 237일 만에 세 권째 일기장을 또 완성했습니다. 2022년 5월 22일 시작으로 오늘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록했습니다. 한 권을 다 채우니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 권에 담긴 지난 237일, 매일 10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스란히 적혀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눈앞 한 페이지를 채운다는 각오로 썼습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을 보면 힘만 빠지는 것처럼 마지막장까지 쓰겠다는 각오보다 오늘 한 페이지에 집중했습니다. 정상에 닿을수록 고비는 오기 마련입니다. 매일 10분을 지켜내는 데도 고비는 있었습니다. 출장, 가족 여행, 휴가, 명절 등 평소와 다른 하루를 시작할 때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적어도 10분은 지켜냈습니다. 차 안에서, 카페에서, 호텔로비로 자리를 옮겨가며 기어코 써냈습니다.


빈 페이지를 마주하는 마음가짐도 조금씩 달라진 것 같습니다. 모든 시작이 힘들 듯 초반에는 한 페이지 채우기도 버거웠습니다. 어떤 날은 고민으로 10분을 넘기기도 했습니다. 반복의 힘이 무섭긴 한 것 같습니다. 매일 단련하니 생각하는 시간이 줄었습니다. 길게 고민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적었습니다. 애초에 잘 쓰려고 시작한 게 아니니 부담 없이요. 그런 반복 훈련이 글 쓰는 그 순간만큼은 손을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렇게 정해놓은 분량과 시간을 지키며 한 권을 완성했습니다.


혼자 시작했지만 지금은 여럿이 함께 쓰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입니다. 혼자 쓰면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데 말로 설명할 방법이 없네.' 좋은 건 어떤 식으로든 나누어야 한다고 배웠기에 용기 내 사람을 모았습니다. 2022년 1월 시작한 '열나글 1기'와 뒤이은 2기까지 8명이 함께 했습니다. 그중 지금까지 여전히 글을 쓰는 네 분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삶 속에 '10분 글쓰기'가 들어갔습니다. 꾸준히 인증을 남기며 다른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처음 제가 꼬드겨 시작은 했지만, 결국 그분들 스스로 해내고 있어서 변화와 성장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비단 같은 혀놀림에 넘어와도 본인이 꾸준하지 못하면 어떤 혜택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1년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 '함께'했기에 가능했습니다. 각자의 이유로 시작해 같은 목표로 함께해 왔습니다. 때로는 칭찬하고, 어떤 날은 공감해 주며 서로 의지했습니다. 그 시간이 쌓인 덕분에 저에겐 사람이 남았습니다.     

매일 10분 글을 쓴 덕분에 사람도 얻었지만,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지금 나는 10분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와는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변화와 성장, 추상적인 단어입니다. 기준도 정하기 나름이고 평가도 제각각입니다. 중요한 건 스스로 두 단어에 얼마나 당당해질 수 있느냐인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 평가받기 위해 변화와 성장을 하는 건 아닙니다. 반대로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상대방의 인정에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성장이 상대방을 도왔다면 스스로도 성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만 잘 살기 위한 변화와 성장은 깨지 않은 달걀이 썩는 것과 같습니다. 껍질을 깬 신선한 달걀만이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해 줄 테니까요.    


산 밑에서 정상을 올려다보면 다리에 힘만 풀립니다. 출발할 때는 발 밑만 보고 걷는 게 도움이 됩니다. 어떤 목표를 갖든 시작하고 단계를 밟았을 때만 닿을 수 있습니다. 과정을 무시하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평지를 지나 가파는 길을 걷다 보면 힘이 들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힘들지 않는다면 사람인지의심해봐야 합니다. 내가 힘들면 남도 힘듭니다. 힘들다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상에 닿기 위해 어떤 선택할지는 정해져 있습니다. 그저 묵묵히 발 밑을 보고 걷는 겁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10분 동안 빈 페이지를 채우겠다는 각오로요. 그 10분이 쌓여 결국 정상에 오르고, 컵라면도 맛보고, 세상을 발 밑에 두는 짜릿한 경험으로도 이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을 원하는 정상으로 데려다 줄 매일 10분이 있나요?  


2023. 01. 14.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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