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2. 14. 05:53
큰딸에게 용돈을 주는 걸 잊었다. 일요일 늦은 밤, 일타 스캔들 열 번째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을 때 큰딸이 콧소리를 섞어 나를 불렀다. 아직 용돈을 받지 못했단다. 다음 날 친구와 극장에 가기로 했다면서 용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용돈을 퉁쳐보려고 영화표를 끊어주겠다고 떠봤다. 표를 먼저 사고 친구에게 표값을 받으라고 했다. 표정이 안 좋다. 친구끼리 터치페이가 익숙한가 보다. 우리 사이에 속칭 카드깡으로 통하는 수법인데 큰딸에게는 익숙지 않은가 보다. 안 통한다. 내일 송금해 주겠다고 하고 어떤 영화를 보는지 물었다. 타이타닉을 보러 간단다.
얼마 전 재개봉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25년 전 개봉 당시 195만 명이 본 영화다. 요즘이야 1천만 관객 영화가 나올 만큼 극장 수가 많아졌지만, 당시는 종로 일대와 주요 도시 몇 곳에 있는 극장이 전부였다. 또 손으로 일일이 표를 만들어 팔았던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관객수였다. 연일 매진 행렬로 9시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때는 극장 앞 매표소에서 줄 서서 표를 샀다. 매표소에 긴 줄을 세울 만큼 인기 있는 영화가 드물었다. 그 당시 영화 한 편 상영 시간은 90분에서 최대 120분이었다. 아마 3시간(195분)이 넘는 러닝 타임은 타이타닉이 처음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이 영화의 인기는 단연 배가 침몰하는 과정이다.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고부터 간신히 빠져나온 로즈와 잭이 바다 한가운데서 마지막을 맞는 장면까지 눈물 콧물 뺏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극장을 빠져나오는 대부분의 여성은 화장이 지워져 카메라를 피해 황급히 도망가는 장면도 뉴스에서 봤다. 어쩌다 TV에서 볼 기회가 있으면 여전히 같은 장면에서 입술을 깨물게 된다.
학원을 마친 큰딸을 태우고 집으로 가는 길에 영화가 어땠는지 물었다. 디카프리오가 늦게 나와 조금 실망했단다. 그때의 디카프리오가 큰딸에게도 멋있어 보였나 보다. 하긴 20대의 디카프리오 때문에 타이타닉을 몇 번이나 봤다는 이들이 흔했으니 말이다. 아내가 차려준 저녁밥을 먹으며 영화평은 계속됐다. 만 15세 이상 관람가지만 큰딸은 만 13세이다. 이 영화는 어쩌면 전체 관람가도 가능할 수도 있었다. 딱 한 장면만 빼면 말이다. 잭과 로즈가 화물칸에 실린 고급 자동차 안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아직도 기억에 나는 건 습기로 가득 찬 유리에 선명하게 찍히는 로즈의 손바닥이다. 큰딸에게 이 장면이 어땠는지 묻고 싶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성에 조금씩 관심을 가질 나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남자와 여자는 이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다르다고 알고 있다. 일찍부터 편하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야 이성을 대하는 태도가 건강해질 수 있단다. 굳이 숨길 게 아니라는 의미이다. 입속에 맴돌았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다. 이 글을 큰딸이 읽는다면 조만간 다시 대화를 시도해 봐야겠다. 그래도 나보다는 아내가 낫겠지.
같은 영화를 본 덕분에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이런 자리가 잦아졌으면 좋겠다. 물론 부모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배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통의 관심사가 있어야 한 번이라도 더 대화가 될 테니 말이다.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큰딸이지만 아직은 대화가 편하다. 부모를 거부하지 않는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같은 관심사를 찾으면 더 좋겠다. 아마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도 큰딸 나이부터 혼자 영화를 보러 다녔던 것 같다. 종로와 을지로에 위치했던 극장을 시작으로 30년 넘게 영화를 즐기고 있다. 큰딸도 영화를 즐기다 보면 취향이 생길 수 있다. 취향이 통하는 영화가 있다면 함께 보면 좋겠다. 보고 나면 할 말도 많을 테니 말이다.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오길 바란다.
2023. 02. 14. 0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