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올레길 걷기

길은 나를 안내했다.

by 김형준

제주도 올레길 트래킹을 위한 준비는 마음의 준비만 했었다. 많은 코스를 돌 수 있는 시간이 안 되기에 두 세 코스만 다녀오려고 마음먹었다. 줄 서 있는 식당이 맛 집이듯 올레길도 추천이 가장 많은 코스를 선택하기로 했다. 7코스를 시작으로 갈 수 있는 만큼 가기로 했다. 계획은 여기까지였다. 배낭 메고 이동하기에 무게는 최소화 하라고 했다. 앞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지구여행 멤버 분들의 한결같은 조언이었다. 필요한 것만 챙기고 최소화했다. 그래도 6kg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전날부터 비가 왔다. 제주도는 비 소식이 없어 비를 피할 장비는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출발일 아침 내리는 비는 피해야 했기에 작은 우산하나 챙겼다. 이마저도 짐이 되는 것 같았다. 이른 새벽이라 공항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는 도착까지 40분 이상 남았다는 알림이 뜬다. 늦지 않기 위해 콜택시를 불렀다. 그렇게 도착한 공항은 이미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일상을 뒤로 하고 어디론가 떠나는 설레임으로 공항 안 공기는 들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이들 중 섞여 일상에서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들뜬 기분으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제주도는 비바람으로 나를 맞았다. 버스 노선을 알아보긴 했지만 막상 공항에 서니 생각했던 대로 될 것 같지 않았다. 스마트 폰을 켜고 다시 검색했다. 일단 서귀포로 가는 가장 빨리 도착하는 버스를 찾았다. 마침 들어오는 공항버스에 올라탔다. 1시간 반 동안 제주도를 가로질러 가는 코스였다. 도착하니 비는 안 오는데 바람에 몸이 날릴 정도였다. 7코스 시작인 올레길 안내 센터를 찾아갔다. 그때가 오전 10시 반이었다. 올레길 안내 센터를 들어서는데 뜻밖의 광경을 접했다. 오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그 곳 직원 분 앞에서 인증서를 받고 있었다. 올레길 425km 26코스 완주를 인정하는 인증서였다. 분명 그 길은 혼자와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몇 날 며칠을 묵묵히 걸었기에 얻을 수 있는 결과였을 것이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설령 시간과 조건이 주어진다고 했을 때 아무런 의심 없이 내 의지대로 끝까지 걸을 수 있었을까 생각 들었다. 시작을 위해 들어선 곳에서 누군가는 완주라는 끝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 분은 또 다른 도전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심 있어 하셨다. 부디 또 다른 도전도 성공하실 수 있길 마음으로 빌며 그곳을 나왔다. 누군가에겐 끝이었던 그 길에서 나의 도전은 시작되었다.

11시 정각 출발했다. 하늘은 맑아 있었다. 햇살은 따스했지만 바람은 옷을 파고들었다. 발걸음을 옮기며 문뜩 걱정이 일었다. 그냥 이대로 걸으면 되는 건가? 지도라도 하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지도는 어디서 구하지? 지도를 본다고 제대로 찾아 갈 수 있을까? 이때 불안감은 미처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것에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이런 불안은 몇 걸음 뒤 해소할 수 있었다. 걷는 길 곳곳 이정표가 있었다. 올레길을 걷는 이들을 위한 표식이었다. 이 표식만 따라 걸으면 완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정표는 눈길이 닿는 곳, 갈림길, 좌, 우 회전길 등 적재적소에 표시 되어 있었다. 나의 우려는 말 그대로 기우였다. 불안을 씻고 눈에 들어오는 이정표를 따라 힘차게 발을 내 디뎠다. 길이 나를 안내한다는 믿음으로 그 길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걷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가 보였다. 오랜만에 접하는 맑은 바다였다. 기암괴석이 만들어 놓은 풍경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눈이 닿는 곳곳 새로운 경치로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 길을 조금 더 걷다보면 숲길로 들어선다. 길옆 하늘로 뻗은 나무가 만들어 내는 싱싱한 공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가슴 깊이 숨을 들여 마셔 본 기억이 오래였다. 코를 통해 가슴 깊숙한 곳으로 공기를 밀어 넣었다. 싱싱한 공기는 몸속을 돌아 머리까지 맑게 해주었다. 맑은 정신은 이 길을 걷게 만들 힘을 두 다리로 전해 주었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자연을 느끼며 길을 이어갔다.

나는 끝이 정해지지 않은 길 위에 올라섰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려주는 이정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정표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 걸으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각 코스가 끝나고 다음 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을 반복적으로 걸어야 한다. 이러한 반복은 우리의 일상과 같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 시간과 공간을 채우는 의미는 다르다. 각 코스마다 그려지는 풍경과 분위기는 제각각이다. 어느 한 곳 같은 풍경을 갖지 않는다. 우리의 시간도 매 순간 다른 의미와 사건으로 채워지고 있다. 모든 시작은 의욕과 열정으로 가득하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새해가 시작되고, 하루가 시작되는 출발점에 우리는 의욕이 넘친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 마저 해 낼 수 있는 열정으로 가득하다. 시간이 흐르고 언덕을 만나고 험난한 길을 지나며 우리의 열정, 체력은 소진되어 간다. 현실에 순응하기 시작한다. 스스로에게 당위성을 찾으려 한다. 안 되는 이유를 찾으며 앞에 놓인 길을, 도전을 회피하려 한다. 길에서 내려 설 수 없듯, 우리 인생도 섣불리 내려설 수 없다. 내려서는 순간 스스로를 낙오자로 치부해 버린다.


길에서 벗어나고, 의욕이 떨이지고, 열정이 식었다고 낙오자가 되는 건가? 스스로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 분명 열정이 식고, 상황이 여의치 않고, 걷는 길이 힘든 건 예상할 수 있는 과정이다. 누구나 완벽할 수 없다. 누구나 결점이 있고 생각지 못한 상황은 항상 생길 수 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예상하고 완벽하게 대처할 수 없다. 이 세상 완벽한 존재는 오직 신뿐이다.(종교를 떠나 절대적인 존재로써 신을 의미 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연함일 것이다. 길을 걷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나고 길이 아닐 것 같은 길을 걸어야 할 때 상황에 따라 우회할 수 도 있어야 한다. 경로를 벗어나 우회한다고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해진 길을 걷지 않는다고 낙오자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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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은 앞서 많은 사람들이 걷었던 길을 코스로 정해 더 많은 이들이 걷는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도에 없는 길이 아니다. 누군가 걸었기에 만들어졌다. 정해진 길을 걷다보니 다른 길도 궁금해졌다. 이 길을 벗어나 다른 길도 가보고 싶다 생각했다. 꼭 이 길만 고집하고 걸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수많은 길 중 올레길 코스를 걷는 건 자신의 선택이다. 올레길을 걷기 시작한 건 내 선택이었다. 그 길을 따라 걷겠다고 한 것도 내 선택이다. 당연히 그 길을 벗어나는 것도 내 선택에 달린 것이다. 다만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 지금 걷는 길이 힘들고, 주어진 하루하루가 힘들고, 목표 달성을 위한 한 걸음조차 내 딛기 힘들다면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다만 그 선택에 책임은 오롯이 자신의 몫 인 것이다. 나의 선택에 따라 또 다른 길을 걷을 수 있듯 낙오자 이거나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경로를 달리하듯 방법을 달리하여 우리가 정해놓은 목적지에 닿을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