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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r 30. 2023

월급쟁이 감정 선택의 기술


약속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했습니다. 협력업체 담당자를 대동해 발주자를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가며 신분을 밝히고 담당자를 만나러 왔다고 했습니다. 안내를 맡은 직원분이 담당자가 자리를 비웠다고 알려줍니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왔으니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잠시 뒤 안내했던 직원이 전화를 바꿔줍니다. 만나기로 했던 담당자였습니다.

"3시 반에 오기로 한 것 아니었나요?"

"어제 통화할 때 4시 반으로 알려주셔서 그렇게 알고 왔습니다."

"지금은 외부에 나왔으니 내일 오전에 통화하고 다시 약속을 잡으시죠."

자라에 앉은 지 5분 만에 다시 일어나 나와야 했습니다. 둘 중 누가 착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따지고 들면 싸우자는 말밖에 안 됐을 겁니다. 이때 필요한 게 '내가 틀릴 수 있다'입니다.


강변북로를 올라타니 이미 차로 가득합니다. 앞 차 꽁무니만 보고 30여 분 달린 것 같습니다. 달리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분명 4시 반에 만나자고 상대방이 먼저 약속 시간을 잡은 걸로 기억납니다. 상대가 먼저 자신의 일정을 확인하고 정한 시간이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곧바로 협력업체 담당자에게도 일정을 통보했습니다. 제 상황만 놓고 보면 제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상대의 태도가 꽤 심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공사를 줄 수도 있는 발주자이니 좋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차가 없어서 시원하게 달리면 좋았으련만 꽉 막힌 차가 제 속마음 같았습니다.


어제 저가 겪었던 상황입니다. 친구였다면 쌍욕이라도 주고받고 끝났을 겁니다. 거래처가 될 수 있는 곳이라 저를 낮춰야 했습니다. 상대방이 작정하고 따지고 들었다면 아마도 제 잘못이라고 시인해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월급쟁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다행히 상대도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저도 한편으로 내가 틀렸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잘잘못 따져봐야 서로 감정만 상할 테니까요. 직장 생활하다 보면 이런 일 종종 생깁니다. 상황은 달라도 억울한 일을 겪게 됩니다. 대개는 잘못이 없어도 인정해야 끝나는 상황이 대부분입니다. 월급 안에 포함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마음 한편에 화를 담고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터트릴 수 있는 위치도 아닙니다. 그저 술 한잔 마시며 속으로 삭이는 게 전부였습니다. 나만 억울하다는 심정으로 말이죠. 술로 감당이 안 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혼자 끙끙 앓았던 것 같습니다.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덮으려고만 했습니다. 지금만 넘기면 또 괜찮아질 거라고 여겼습니다. 문제는 덮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문제를 똑바로 볼 때 해결책도 찾게 되는 거였습니다.


똑바로 보기 위해 구체적으로 쓰라고 합니다. 화가 났으면 무엇 때문인지 자세하게 적습니다.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도 써봅니다. 그때 감정은 어땠는지도 떠올려 보면서요. 상대의 태도에 화는 나지만 상대방은 제가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 바꿀 수 있는 건 오로지 저의 태도입니다. 태도를 선택하려면 상황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고 이때 필요한 게 구체적으로 적는 겁니다.


두루뭉술하게 적으면 억울했던 감정도 얼렁뚱땅 넘어갑니다. 눈에만 보이지 않게 거적으로 덮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거적에 덮인 곳은 계속 섞고 있을 뿐입니다. 바람이 통하고 햇빛을 봐야 섞지 않습니다. 내 감정도 자세히 자주 들여다봐야 어떤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내가 모른척한 감정을 상대가 알아줄 리 없습니다. 나라서 똑바로 볼 수 있지 어느 누구도 내 감정을 올바로 봐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일 일기를 쓰고 이렇게 구체적으로 적어보게 됩니다. 글로 쓰면서 얻게 될 효과는,

첫째, 그때의 내가 어떤 감정이었는지 되새길 수 있습니다.

둘째, 나는 잘못한 게 없는지 다시 한번 성찰하게 됩니다.

셋째, 상대방의 감정, 생각은 어땠는지 짐작해 봅니다.

정답을 찾겠다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나와 상대방이 어땠을지 짐작해 보는 것만으로도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내 행동, 감정을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시간 동안 운전하며 성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말이 거창해 성찰이지, 월급쟁이 신세 한탄했습니다. 한탄하며 그럴 수 있다고 한편으로 인정했습니다. 적어도 내 감정은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감정을 빼고 살아야 하는 월급쟁이만의 처세이지 싶습니다. 또 이렇게 글로 남기며 다시 한번 생각과 감정을 다듬습니다. 언제까지 직장 생활할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사고 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죽은 듯 지내다 때가 되면 제 일을 선택하고 보란 듯이 뒤돌아설 것입니다. 그날을 기약하며 오늘도 출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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