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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Apr 07. 2023

시작은 엉망, 과정은 엉성, 결말은 풍성


"아빠! 수행평가 만점 받았어."

음악 첫 수행평가 과제는 클래식을 소개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거였다. 모둠 넷 중 둘은 사춘기가 세게 왔는지 비협조적이라며 걱정했다. 말을 해도 듣지 않고 약속도 지키지 않는단다. 대본 담당은 2주 동안 두 줄 써온 게 전부였다. PD를 맡은 큰딸은 두고 볼 수만 없었나 보다. 한 날은 작정을 했는지 늦게까지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이튿날 수업을 듣고 난 나에게 자기가 쓴 대본이라며 보여줬다. 시작 멘트부터 그럴듯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를 쓴 캔 블랜차드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했다. 새 학기를 맞는 친구들에게 동기부여 메시지를 담았다. 아무래도 나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주야장천 책 보고 글 쓰니 어느 정도 지분은 있지 싶었다. 도입부가 매끄러웠다. 이어지는 곡 소개, 사연 신청자의 기발한 아이디,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퀴즈 등 지루하지 않은 구성과 내용이었다. 별로 손볼 게 없었다. 이튿날 발표를 했고, 정해진 순서보다 먼저 한 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선생님은 감점 요인도 있었지만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만족스러운 발표였다며 만 점짜리 감상평을 남겼다. 원래 순서였다면 감점을 받고도 남을 실수였단다.


큰딸은 준비하는 동안 매일 걱정했다. 잔소리에도 꿈쩍 않는 친구가 이해 안 됐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하자니 엄두 안 난다며 한숨만 쉬었다. 며칠 동안 밥상에 앉을 때마다 진행 상황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졌다. 나서서 해보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스스로 결정하길 바랐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같이 침몰할 것인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도해 볼 것인지. 큰딸은 후자를 선택했다. 스스로 밥을 지었다. 다행히 밥이 잘 됐고 모두가 양껏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 말을 안 듣던 두 친구도 실전에서는 제 역할을 잘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며 그제야 웃었다.


조원 구성도 마음에 안 들었고 말을 듣지 않는 친구 탓에 시작은 엉망이었다. 약속 시간도 어기기 일쑤였고 자기 역할에는 관심도 없었다. 본인의 행동으로 다른 조원이 피해를 본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사춘기라는 핑계는 안 통할 테다. 한배를 탔으니 앞으로 나아가려면 노를 안 저을 수는 없다. 한 명이 멈추면 남은 사람이 그 사람 몫까지 떠안는 게 팀의 운명이다. 거기까지 신경 쓴다면 사춘기가 아닐 테니 말이다.


엉망으로 시작은 했지만 결국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희생했다. 모두를 위해 자신이 기꺼이 수고를 맡았다. 그렇다고 희생이 꼭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노력이 헛수고로 끝날 수도 있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할 거다. 1퍼센트의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다는 말처럼. 노력에 운도 따랐고 결국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결과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매번 결과가 좋으리란 법 없다.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선택을 했도 결과는 얼마든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겪은 이 같은 일은 예측이 불가능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예측이 가능한 한 가지가 있기는 하다. 글쓰기이다. 어떤 글이든 시작은 엉망이다. 수백만 부의 판매고를 올린 작가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쓰는 모든 초고는 엉망으로 시작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수많은 작가 중 초고를 완벽하게 써내는 이는 없다. 우리 손에 들린 그들의 책은 수많은 퇴고를 거친 결과물이다. 심지어 그 결과물에도 만족해하지 못하는 작가가 더 많다. 손을 댈수록 글은 나아지는 게 불변의 법칙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모든 일에 결과를 알 수 없듯 내가 쓰는 글도 얼마나 나아질지 알 수 없다. 엉망으로 시작한 일도 매 순간에 집중하면 조금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퇴고에 정성을 다하면 아무리 엉망인 글도 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자신의 글에 만족하지 못해 쓸 엄두가 안 난다고 한다. 엉망인 글을 차마 보여줄 수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말은 그 자리에서 내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다. 글은 세상에 내놓기 전에 얼마든 고칠 수 있다. 원하는 결과물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 있다는 의미이다. 퇴고에 정성을 들이는 만큼 말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쓴 지 5년이 넘었다. 무턱대고 시작한 게 지금에 이르렀다. 남의 등만 보고 따라가던 나였다. 이제는 내 등을 보고 따라오는 이들도 보인다. 엉망이었던 삶이 책과 글쓰기로 조금씩 정리가 되었다. 정성껏 글을 고치듯 하루하루에 정성을 다했다. 정성을 들인 글이 좋아지듯 정성을 들인 일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날 선 말이 줄었고, 짜증보다 여유를 찾았고, 불평보다 한 번 더 움직였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이미 살아온 시간이 엉망의 초고였다면, 앞으로는 퇴고로 거듭나는 삶일 것이다. 글이 고칠수록 좋아지듯 삶도 고쳐서 쓸 수 있을 테다. 고쳐 쓸 각오를 새롭게 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고쳐 쓰다 보면 내 삶이 더 나아질 거란 예측도 충분히 가능하다. 나도 그런 기대로 책방 코치가 되려고 한다.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될 거로 예측된다. 근거 있는 예측이고 앞으로 입증해 보일 테다.





https://blog.naver.com/motifree33/223040680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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