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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Apr 14. 2023

파전을 제때 뒤집을 용기


카우디네 협곡. 로마군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물러설 길도 없었다. 상대방은 무장한 채 길목을 막고 있었다. 병사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였다. 장군들마저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패배는 정해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 무너진 참호 한쪽을 새로 세우기 시작했다. 누구의 명령도 없었다. 누가 봐도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는지 한 명씩 뒤따랐다. 그리고 훈련도 시작했다. 참호를 새로 짓고 훈련으로 몸을 움직이니 마음이 편해졌다. 정신이 안정되자 싸울 수 있다는 의지도 되살아났다.


이를 지켜본 상대 병사는 이들을 조롱했다. 비웃과 조롱에도 로마군은 각자의 역할을 묵묵히 해냈다. 머지않아 상황은 반전됐다. 로마군의 사기에 적군 싸울 의지를 잃었고 타협하기에 이르렀다.


에픽테토스는 역경을 겪을 때 "바로 이 일을 위해 훈련하고 단련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했다. 세네카도 비슷한 시기에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움찔하고 싶지 않다면 그 일이 닥치기 전에 미리 훈련하라"라고 말했다.


사업한다며 4년 반을 매달렸다. 결국 대표의 야반도주로 끝이 났다. 서른에 남은 건 빚뿐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대학 졸업장도 없었고 기술 자격증도 없었고 내놓을만한 경력도 없었다. 패잔병이나 다름없었다.


방구석에서 뒹굴기를 열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실직한 걸 그제야 알게 된 친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며 이튿날 연락처를 건넸다. 진자리 마른자리 가릴 때가 아니었다. 신발이 젖어도 상관없다. 일단 일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친구의 도움으로 덥석 일자리를 물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아무 준비도 없이 전공과 다른 일을 시작했다. 같은 사무실에 나보다 4살 어린 직원보다 아는 게 없었다. 내 딴에 자존심이 남았는지 모른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몰래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다. 일하면서 배우는 게 노력의 전부였다. 순전히 운이었던 것 같다. 그 정도 노력에도 11개월 만에 정직원이 되었다.


당장 먹고살기 위해 익지도 않은 파전 뒤집듯 섣불리 진로를 바꿨다. 고등학교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내가 먹고살기 위해 토목 회사에 입사했다. 책에 배운 얕은 지식이 전부였다. 그러니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초가 엉성하고 짓다만 건물처럼 보잘것없다. 솔직히 지금도 내 업무에 자신이 없다. 누가 작정하고 물어보면 도망가 버릴지도 모른다. 건축을 전공으로 정했다면 사업 실패에도 어쩌면 더 정진했어야 맞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햇수로 6년째다. 그동안 팔리지 않은 책 몇 권 쓴 게 전부다. 그 책을 쓰기 위해 지금까지 한눈팔지 않고 걸어왔다. 첫 발을 내딛기까지 꽤 오래 고민했다. 20년 해온 일을 그만둘 만큼 가치 있을지 확신이 안 섰다. 셀 수 없이 많은 아침을 고민에 매달렸다. 그리고 결심을 세웠다. 당장은 손에 잡히는 게 없지만, 충분히 노력해 볼 가치와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로마군처럼 진퇴양난의 상황은 아니었다. 당장은 직장이 있었고 먹고살 만했다. 그렇다고 지금이 계속 지속되는 건 아니었다. 준비된 건 없었지만 준비를 해야 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었다. 내 주변에 보이는 뻔한 길을 걷는 이들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을 줄 알았다. 막막했던 어둠에 빛을 내준 게 책이었다.


책을 읽는다고 당장 달라진 건 없었다. 오히려 책은 서두르지 말라고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반항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게 맞을 것 같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더라도 더 멀리 내다보려는 참을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니 걱정보다 희망을 가지라고 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말이 달콤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노력한 만큼 손에 잡히면 좋겠지만 그런 게 없으니 더 조바심이 났다. 조바심은 시야를 좁게 했다. 시야가 좁아지면 마음도 조급해진다. 마음이 조급해지니 달콤한 말도 달콤하게 들릴 리 없었다. 그때 만약 참지 못했다면 서른의 실수를 반복했을 수도 있다.


조급함을 물리치고 매일 해야 할 일에만 집중했다. 로마군이 참호를 새로 만들고 훈련을 반복하는 것처럼. 같은 일상을 반복한 힘 덕분인지 처음보다는 덜 휘둘린다. 가장 쓸모없는 비교의 감정에서도 의연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시련도 있었지만 잘 버텨올 수 있었다. 매일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이전과 다른 직업으로 다른 삶을 살 것 같다. 살다 보면 분명 다양한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짐작 가능한 일도 있고, 예상을 빗나가는 일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은 내 존재를 부정하게 할 수도 있다. 반대로 감당 못할 만큼 복에 넘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어느 것이든 나를 흔들어 놓을 것이다.


6년째 매일 읽고 쓰는 이유는 이런 일들에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뜻하지 않은 일에도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파전은 알맞게 익었을 때 뒤집어야 제맛을 낸다. 그때를 알아보는 건 요리사의 경험과 지혜다. 경험과 지혜가 쉽게 생긴다면 맛집 또한 우후죽순 생길 테니 말이다.


지금까지 나를 붙잡아준 게 책과 글쓰기였듯, 앞으로 나를 올곧게 세워줄 것 또한 독서와 글쓰기이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살게 될지 모른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건 오늘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내는 것뿐이다. 나를 흔드는 일에 움찔하지 않고 당황하지 않게 오늘도 한 편의 글로 훈련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일만 신경 쓰고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한다. 미국의 농구선수 앨런 아이버슨이 말한 유명한 구절을 빌려서 이야기해 보겠다. "연습에 관한 얘기냐고요? 네, 연습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연습이기 때문이죠. 연습을 통해 마음속에서 행동을 하나나 되짚어갑니다. 이 상황이나 그 상황에서 뭘 했는지 몸이 기억합니다. 강해지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강해집니다. 연습을 반복하면 계획했던 던 범위까지 해내게 됩니다. 어려운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게 됩니다. 불편한 상황이 편해집니다. 급격하게 지치는 지점까지 의도적으로 인터벌트레이닝을 하면서 달리기 선수로서 역치를 높입니다. 익숙해집니다. 눈을 가리고 소총을 조립하고 중량 조끼를 입고 뛰게 됩니다. 천 번 연습한 뒤 압박받지 않는 상태에서 천 번 더 연습해 보면 뭘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노하우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용기를 내게 하는 것은 준비다.

- 라이언 홀리데이 《브레이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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