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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Apr 13. 2023

단어에 갇히지 않으려면


주변이 밝아질 즈음 서울톨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속도가 줄기는 했지만 정체되는 구간은 없다. 목적지까지 20분 정도 남았다. 사무실이 아닌 현장으로 출근하는 중이다. 어디로 출근하든 출발시간은 같다. 어디를 가든 출근길 정체는 피하고 싶다. 그러니 새벽에 나서는 게 이제 익숙하다.


익숙해 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시행착오도 겪는다. 시간을 당겨서 출발해 보기도 하고, 다른 길로 가 보기도 한다. 여러 시도 끝에 가장 효율적인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렇게 길이 정해지면 그저 반사적으로 같은 길을 가게 된다. 익숙한 게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익숙해지면 편하다. 매일 가던 길이라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20년 넘게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미리 알 수 있게 되었다. 상황만 달라질 뿐 대처법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좋게 표현해 노련미라고 하고 달리 말하면 타성에 젖은 것이다.


노련함이 생기면 예측이 가능하다. 한 수쯤 앞을 내다보게 된다. 미리 대처할 수도 있고 실수 없이 대응하게 된다. 그러니 굳이 다른 길이나 방법을 찾을 이유도 없다. 이보다 좋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인생도, 일도, 개인의 성장도 말이다.


월요일 출근길 칩 히스의 《넘버스 스틱》을 읽었다. 오늘 출근길 라이언 홀리데이의 《브레이브》를 읽었다. 《넘버스 스틱》는 숫자를 통해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을 가질 수 있다고 알려준다. 《브레이브》는 삶의 미덕인 용기, 절제, 정의, 지혜 중 '용기'에 대해 말한다. 두 책이 공통으로 다룬 이야기가 있다. 나이팅 게일의 일화다.


귀족 출신인 그녀는 열여섯 살에 훗날 '부름'이라는 것을 받게 된다. 삶을 받칠 사명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걸 버려야 할 수도 있는 부름이었다. 그 뒤 8년 동안 주저했다. 그리고 용기를 냈고 여러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참혹한 현실을 눈에 담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병원을 변화시키기 위해 기득권은 물론 여러 운동에 앞장선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병원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그런 그녀를 움직인 건 당연한 걸 거부한 용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나이팅 게일은 전장에서 사망하는 것보다 치료를 제대로 못 받고 죽는 숫자가 더 많다는 걸 알았다. 그 숫자를 줄이기 위해 기득권과 정부와 싸웠다. 오랜 시간 현장에서 모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들을 설득했다. 뜻대로 풀리지 않아도 용기를 내며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무모해 보였고, 어떤 이에겐 익숙함에 반기를 드는 행동으로 보였다. 그래도 그녀는 묵묵히 자신의 신념대로 하나씩 헤쳐나갔다.


익숙한 길을 벗어나야 새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편안함을 버려야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 기득권에 저항해야 발전이 가능하다. 새로움은 언제나 진통을 동반한다. 고통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바라는 풍경도 변화도 발전도 가능할 것이다.


누구나 짐작 가능한 익숙한 표현을 쓰면 그저 그런 글이 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다고 했다. 창조는 모방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글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어디서 보았을 법한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쓰면 똑같은 글이 되고 만다. 같은 의미라도 다른 표현의 단어를 찾으면 익숙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약간의 의외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니던 길을 벗어났을 때 비소로 새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표현을 사용했을 때 비로소 다른 문장을 쓰게 된다.


늘 비슷한 단어로만 글을 쓰면 생각도 그 안에 머문다. 스스로 한계를 짓는 것과 같다. 같은 의미 다른 표현의 단어는 찾는 만큼 보인다. 책에서 뉴스에서 일상에서 TV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르게 보려는 눈과 약간의 노력만 있으면 충분하다. 단어가 다양해지면 생각도 풍성해진다고 믿는다. 대화도 물론 다채로워질 수 있다. 말은 생각에서 비롯되고 생각은 내가 쓰는 단어에 따라 깊이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읽고 글을 쓰라고 하는 것이다. 읽고 쓰기만큼 어휘를 풍부하게 해주는 게 없기 때문일 테다.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나이팅 게일을 시 한 편으로 표현했다. 세상을 바꾼 그녀의 용감 행동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전해진다.


영국의 오래된 기록을 통해

그 말과 노래가 전해 내려오네.

빛 한 줄기가

과거의 문지방에서 빛을 비추네.


등불을 든 여자가

이 땅의 위대한 역사에 서 있네.

고귀하고 선한

영웅적인 여성이여.

- 라이언 홀리데이 《브레이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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