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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y 15. 2023

쓰다 보면 나아지겠지


7시 40분, 이 시간에 늘 혼자 있을 수 있어서 단골 카페를 찾는다. 오늘은 건너 테이블에 환갑은 넘어 보이는 어르신 네 분이 격하게 담소를 나누는 중이다. 헤드폰 음악소리를 뚫고 들어올 정도로 대화에 심취해 있다. 소리를 키워보지만 말소리는 여전히 들린다. 손가락에 힘을 모으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체 집중해 본다. 음악에 말소리가 섞이며 손이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슬슬 신경이 더 쓰인다. 어쩌자고 이 시간에 남남녀녀 어르신이 회동 중인지 모르겠다. 차림새를 보니 산에 가는 것 같다. 8시, 자리를 떠난다.


다시 고요해졌다. 음악 소리만 들린다. 이제부터 제대로 써 볼 의지가 타오른다. 근데 뭘 쓰지? 건너편 테이블이 시끄럽다는 핑계로 지금 상황이 못마땅하다고 글을 시작했다. 몇 줄 쓰다 보니 상황이 달라졌다. 불평을 더 쓰기 민망하다. 고작 몇 분을 못 견뎌 남탓하는 글을 쓰려고 했으니 말이다. 글감이라고 찾은 게 그다지 글감 같지 않다. 쓰기를 멈출까 싶다가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써보기로 했다. 이왕 시작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써내는 게 맞을 것 같다. 주어진 시간 동안 쓰다 보면 마무리는 짓겠지.


항상 할 말이 많아서 쓰고 싶은 글도 많았으면 좋겠다. 노트북을 열면 손가락을 주체하지 못할 만큼 써 내려가면 좋겠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다다다다 쓰는 재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나 빈 화면을 보면 손가락이 먼저 안 나간다. 그나마 메모하고 키워드 적다 보면 꾸역꾸역 쓰기는 한다. 그것도 어쩌다지, 매번 빈 화면을 보면 오늘은 또 무얼 쓰나 고민이 먼저다. 누구는 이런 고민도 글감이 된다고 했다. 고민도 하루 이틀이지. 만날 푸념만 늘어놓을 수도 없고. 매번 인사이트 가득한 글 쓸 재주도 없고. 사람 사는 모습 다 고만고만해 식상해할 것도 같고. 도대체 글감은 어디서 샘솟는 걸까?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으면 몇 가지 문제와 마주한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게 글감이라고 생각한다. 문장력이 뛰어나고 맞춤법에 학식이 깊어도 글감은 늘 발목을 잡는다. 글 솜씨를 타고난 일부에겐 내 고민이 고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글감을 왜 고민해야 하냐고 반문하지 않을까? 셀 수 없이 많은 작가의 입에서 글감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들었다. 물론 그들도 같은 고민을 하기에 저마다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일 테다. 도움을 받는 사람도 있고 들어도 막연한 사람도 분명 있다. 이 말은 수학 공식처럼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답은 없지만 저마다 방식으로 풀이하는 방법은 존재한다. 사람 수만큼의 방법이 있다는 의미이다. 수학 문제를 풀기 위해 더하고 빼고 나누고 곱하는 기본기가 필요하듯, 글감을 찾는 것도 기본으로 활용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주변을 관찰하고, 책을 읽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평소 생각을 메모하는 거다. 아니면 직접 경험했던 것들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도 방법이다. 여기에 플러스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고 발전시켜 활용하는 것이다. 꾸준히 단련하다 보면 글감이 샘솟지는 않아도 어렵지 않게 찾을 정도는 된다. 쓰고 싶고 써야 할 때 거부감이 없이 시작할 수 있을 정도면 자기만의 방식을 찾았다고 할 수도 있다. 나는 아직인 것 같다.


무엇을 쓸지 매번 고민하면서도 관심 끄는 글을 쓰겠다는 욕심은 넘친다. 욕심이 동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아니면 말 그대로 객기로 그칠 수 있다. 어떤 내용을 쓸지도 안 정하고 욕심부터 부리니 글이 잘 써질 리 만무하다. 이왕이면 이렇게 애쓰며 쓴 글이 관심받길 바라는 건 인지상정이다. 순서의 문제인 것 같다. 욕심은 분명 동기가 될 수 있다. 욕심 덕분에 글감도 찾을 수 있다. 그런 과정 뒤 쓴 글이 어쩌다 관심을 끌게 될 수도 있다. 당연히 같은 과정으로 글을 써내도 반응이 없는 글을 쓸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짚어봐야 한다.


상대방 반응에 반응하기 위해 글을 쓰는가? 반응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100퍼센트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사람이라 반응에 반응하는 게 당연할 테다. 그래도 굳이 의미를 찾아야 한다면, 나는 글을 쓰고 싶어서 글을 쓴다. 조금 더 나은 글을 써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이왕 시작한 거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글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게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언제라고 못 박을수도 없을 것이고. 평생이 걸려도 죽기 전에 한 문장, 한 권이라도 남긴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 지금 이런 고민도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근육이 자라려면 상처가 나야 하듯 말이다.  


고민하고 공부하고 애쓰는 과정이 나에겐 약이 된다. 과정이 힘은 들어도 적어도 매일 쓰고 있다. 생각해 보면 글감이 안 떠오르는 게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건 아니다. 이 순간에 단지 어떤 글을 쓸지 막연할 뿐이다. 어찌어찌 쓰다 보며 또 이렇게 한 편 쓰게 된다. 말 그대로 꾸역꾸역 쓰게 된다. 덜 고민하고 더 공부하고 부지런 떨다 보면 차츰 나아질 거로 믿는다. 내 글에 내가 먼저 반응해 주자. 적어도 나는 내 글을 외면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러니 그냥 계속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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