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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y 31. 2023

이름을 불러주세요


"커피 한 잔 주세요."

"어떤 커피로 드릴까요?"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아이스로 드릴까요? 따뜻한 걸로 드릴까요?"

"아이스로 주세요."

"사이즈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작은 컵으로 주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작은 컵이라고 주문했으면 대화가 길어지지 않았다. 커피에도 종류가 다양하다. 원두에 따라 맛도 다르다. 우유가 들어가느냐 어떤 시럽을 넣느냐 내리는 방법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이름으로 불러주면 존재가 선명해진다.


기침이 떨어지지 않아서 격리 전 약을 받았던 코코이비인후과를 다시 찾았다. 요즘 감기, 독감, 코로나 증상으로 병원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들었다. 10시부터 진료를 시작했고 10시 반쯤 도착해 이름 적으니 내 앞에 대기자가 30명이나 있었다. 마땅히 갈 곳도 없어서 병원 안 소파에 앉았다. 스마트폰으로 인스타그램, 블로그, 뉴스 검색까지 순회를 하고 나니 30분 정도 지났다. 안내 화면에 대기 순번 20번이라고 뜬다. 교보 e북을 열었다. 《은유란 무엇인가》를 멈춘 부분부터 다시 읽었다. 읽다 보니 졸리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꺼풀이 감겼다. 퍼뜩 정신 차리고 태연한 척 다시 읽었다.


몇 줄 읽고 나니 전화가 온다. 고등학교 동창 규완이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통화했는지 기억도 안 났다. 전화를 해봐야지 마음만 먹었었다. 막상 전화해도 무슨 말을 할지 막연해 통화 버튼을 못 눌렀던 것 같다. 규완이의 첫 마디도 내 생각과 다르지 않았보다. 지금 이렇게 통화하지 않으면 또 언제 할지 몰라 전화했다고 한다. 그 말이 고마웠다. 잊지 않고 연락해 주니 더 고마웠다. 여전히 건축 설계 일을 한다고 했다. 몇 년 전 서울이 답답해 춘천으로 이사했단다. 의외였다. 회사에서 배려해 준 덕분에 출퇴근하는 중이라고 했다. 술도 안 마셔 약속도 거의 없고, 기차 시간 때문에 야근도 거의 안 한다고 했다. 자세하게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지금 생활에 꽤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내가 아는 규완이는 빠른 것보다 느린걸, 복잡한 것보다 단순한 걸 좋아했던 걸로 기억한다. 여전히 결혼을 안 했단다. 안 한 건지 못 한 건지 더 묻지 않았다.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아서다. 5분 정도 통화한 것 같다. 저녁 대신 점심에 보자는 말을 남기도 통화를 마쳤다. 그 사이 대기 순번 10번이 되어 있었다.


약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고 쓰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고 쓸 수 있다. 책을 읽었다고 적을 수도 있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병원에도 이름이 있고, 스마트폰 앱도 종류가 다양하고, 책에도 제목이 있고 친구도 이름이 있다. 각각의 사물과 사람에 이름을 붙여주면 존재가 선명해진다. 존재가 선명해지면 독자도 집중해서 읽게 된다. 독자의 시선을 잡아두는 것 역시 작가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일요일 오전 병원을 찾은 건 평범한 일상이다. 지나고 나면 기억에도 남지 않는 시간이다. 대신 그 순간에 각각의 사물과 사람에 이름을 붙여 글로 남겼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이 글을 읽게 되면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글로 남기면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순간도 나는 물론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기억으로 남길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이름이 있는 것들은 이름을 붙여주자. 이름을 붙여주면 글에는 생동감이 생기고 생생하게 기록된 순간은 오래 기억될 수 있다.





https://blog.naver.com/motifree33/223114544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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