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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y 31. 2023

때로는 나부터 챙기기


키보드에 손이 안 간다. 화면만 한동안 바라봤다. 생각 말고 손가락을 움직여 쓰라고 말한다.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고 생각만 잔뜩이다. 찰나의 순간인 것 같다. 생각보다 손가락을 먼저 움직일지, 손가락보다 생각을 먼저 할지. 떠오르는 대로 쓰려니 손이 멈칫한다. 아마도 머릿속 편집자가 활동을 시작한 것 같다. 편집자는 온갖 기준을 끌어다 놓고 단어 하나 문장 하나씩 검열을 시작한다. 몇 문장 써보지만 편집자의 칼날을 피해 갈 수 없다. 여러 잣대를 들이대며 문장을 몽글몽글 감싸버린다. 더 나아가지 못하는 문장과 단어는 화면에서 사라진다. 그 사이 시간만 흐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손가락은 더 안 움직인다. 정해놓은 시간 안에 어떻게든 완성하려면 망설일 시간이 없다. 시간에 쫓긴 글은 내용과 결말이 엉성해진다. 그동안 그런 글을 많이 썼다. 완성하고 출근해야 마음이 놓였다. 잘 쓰고 못 쓰고 보다 시작하고 끝을 냈다는 데 의미를 뒀다. 마무리 짓지 못했으면 다시 꺼낼 때까지 찝찝한 기분이 든다. 일하는 내내 신경 쓰인다. 다행인 건 그동안 하루를 넘겼던 글은 없었다. 무슨 수를 쓰든 그날 마무리 지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결국엔 써냈다는 데 위안을 삼았다.


며칠 동안 생각이 많았다. 여전히 손보다 생각이 먼저다. 왜 글이 안 써는지 고민해 봤다. 글감을 못 찾아서? 널린 게 글감이다. 문장을 잘 쓰고 싶어서? 퇴고에 정성을 들이면 된다. 근사한 글을 쓰고 싶어서? 당연히 그러고 싶지만 실력이 부족한 걸 어쩌겠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관심받겠다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아니다. 이런 고민도 결국에는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 인 것 같다. 질문을 바꿔야겠다.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질문이 바뀌어도 답은 똑같다. 많이 쓰는 거다. 많이 쓰되 더 많이 읽고 배우고 연습하는 거다. 글은 쓰면서 나아진다고 했다. 생각하고 고민한다고 글은 나아지지 않는다. 엉망인 글이라도 계속 쓰다 보면 나아진다고 했다. 안 쓰면서 좋아지길 바라는 건 달리지도 않고 결승선을 통과하겠다는 것과 같다. 오늘 쓰는 이 글도 과정일 뿐이다. 멈추지 않고 쓰면 성장도 멈추지 않는다. 생각만 한다고 성장하지 않는다. 엉성한 글이라도 얽히고 설 퀴다 보면 제법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말이다.


누군가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불안이 있었나? 그럴 수도 있다. 그런 불안은 늘 따라다니는 것 같다. 내 딴에 제법 근사하게 쓴 것 같은데 반응이 시원찮을 때가 있다.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 건 거짓말이다. 이왕이면 한 명이라도 더 보고 한 번이라도 더 좋아요를 눌러주길 바란다. 바라는 반응이 없을 때 불안을 느낀다. 내 글이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지 제 발 저린 꼴이다. 그럴수록 더 조바심이 난다. 가치 없는 글을 쓰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 이런 감정, 생각이 쓸데없는 거라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정체기가 한 번씩 올 때면 나도 어쩔 방법이 없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꺼냈다. 아무 곳이나 펼쳤다. 구체적으로 써보라는 내용이었다. 내 감정의 모습을 보여주라고 말한다. 내 감정을 보여주는 글은 어떤 글일까? 지금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쓰는 걸로 이해했다. 감정을 들여다보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안 움직인다.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지식의 저주인가? 아는 게 조금 늘었다고 맞다 틀리다는 기준을 먼저 들이댄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써지지 않는다. 느껴지는 그대로 쓰기 위해 어디서부터 써야 할 지도 감이 안 온다.


내 기분에 취해 풀어내는 글은 일기다. 일기는 나만 보는 글이다. 사람에게 보이는 글에는 적어도 한 가지라도 얻는 게 있어야 한다. 개똥철학이라도 나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런 게 없는 글은 혼자만 봐야 한다. 나 같은 고민하는 사람 제법 있을 것 같다. 고민해도 답을 못 찾을 수도 있다. 답을 알아도 쉽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냥 쓰는 거다. 내 감정이 어떤지 앞뒤 없이 그냥 적어보는 거다. 쓰다 보면 정리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글에는 정답이 없다고 했다. 지금 쓰는 글이 정답이다.


그러니 망설이고 걱정하면서 멈추기보다 그래도 그냥 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엉성한 글이라도 쓰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나아지기 마련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설령 얻을 게 없는 글이면 어떤가? 가끔 이렇게 속에 있는 말을 꺼내놓으면 적어도 본인은 후련하지 않을까? 때로는 남보다 나를 먼저 챙길 때도 필요한 것 같다. 내가 있고 남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내 기분이 좋을 때 상대방도 기분이 좋아지는 글을 쓸 수 있다. 오늘도 근근이 한 편 썼다. 내일은 조금 더 수월해지겠지.






https://blog.naver.com/motifree33/223114544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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