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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un 08. 2023

다 쓴 글을 날리고 배운 것


20분 동안 쓴 글을 한순간에 날렸다. 한동안 안 하던 실수였다. 블로그 시작하고 기능이 익숙하지 않았을 때 한두 번 했던 실수다. 순식간에 백지가 된 화면을 보면 할 말을 잃는다. 저 깊은 곳에서 분노가 끓어오른다. 조심하지 않은 나를 원망한다.


분노하고 원망해도 바뀌는 건 없다. 저장하지 않은 글을 살릴 방법은 없다. 받아들이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한다. 이해한다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성을 회복한 뒤에야 다음으로 무얼 해야 할지 선택하게 된다.


선택지가 딱히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다시 쓰는 것뿐이다. 이미 사라진 글, 한 번 쏟아낸 글은 똑같이 쓸 수 없다. 한두 번 경험해 보니 그렇더라. 글을 쓸 때의 나와 다 쓴 글을 날리고 난 뒤의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완벽하게 똑같은 글을 써내지 못한다. 그러니 다시 쓰는 게 유일한 선택지이다.


다시 쓰면 더 좋은 글을 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마음의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탓하는 마음으로 다시 쓰면 좋은 글이 안 나온다. 깨끗하게 잊고(쉽지 않겠지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쓰면 그나마 나은 글이 된다. 이때도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억지로 글을 쓸지,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긍정하며 다시 쓸지를 선택한다. 둘의 결과는 분명 다르다. 결과가 어떨지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당장의 끓어오르는 분노와 원망을 내려놓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닌다. 어쩌면 이런 고민이 고민이 아닌 사람도 있다. 옷에 묻은 보이지 않는 먼지를 털어내듯 아무렇지 않게 곧바로 다시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사람은 오랜 시간 마음을 수련하지 않을까 싶다.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으며 자기만의 노하우를 갖게 된 거다. 같은 상황을 여러 번 경험해 본 사람은 적절한 대처법도 알고, 그렇게 행동한다. 그래서 혹자는 경험만큼 무서운 게 없다고 말한다.


세상 살면서 겪을 모든 일을 경험해 보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르게 처신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경험하는 것보다 경험해 보지 못하는 게 더 많다. 그래서 항상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배워야만 알 수 있는 게 더 많으니 말이다.


학문하는 길에는 따로 지름길이 없으니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라도 묻는 것이 옳으며, 심지어 시중을 드는 하인이 나보다 하나라도 많이 알면 그에게 가서 배워야 한다. -연암 박지원-

《오십에 시작하는 마음공부》 김종원


어쩌면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순간에 배움이 있는 건 아닐까?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보면 배울 게 보이는 것처럼. 눈앞에서 사라진 글을 다시 되돌릴 방법은 없다. 되살리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포기가 먼저이다. 포기하고 다음 행동을 선택하는 거다. 분노할지 다시 쓸지. 분노했을 때 결과는 이미 안다.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반대로 다시 쓰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이미 안다. 지금 이렇게 글 한 편은 남길 수 있다. 글을 쓰며 마음도 다잡고 태도도 되짚어 봤다. 이런 게 경험을 통해 내가 배울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다 쓰고 나니 시작할 때보다는 마음이 진정된다. 글쓰기를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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