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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ul 22. 2023

감자 캐는 대신 고구마를 키우다


노예라는 단어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불편한 이유를 생각해 봤다. 노예로 살지만 노예라고 불리는 걸 원치 않아서인 것 같다. 월급쟁이인 나는 월급의 노예다. 자영업자는 매출을 올려주는 손님의 노예다. 학생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공부의 노예가 된다. 굳이 그렇게까지 표현해야 하냐고 물을 수 있다. 맞다, 굳이 노예라고 표현하는 건 지나칠 수 있다. 직장인 중에도 월급보다 일의 가치를 두고 직장에 다닌다. 자영업자도 매출보다 서비스를 위해 정성을 다한다. 학생도 성적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노력한다. 내가 노예인지 아닌지는 스스로 정의기 나름이다.


감자를 잘 캐는 일꾼이 있었다. 주인은 그를 눈여겨봤다. 다른 일꾼보다 일머리 있었다. 하루는 주인이 외출하는 동안 일꾼에게 일을 맡겼다. 캐 놓은 감자를 크기별로 분류해 놓으라는 지시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은 멍하니 감자 앞에 서 있는 일꾼을 봤다. 그의 앞에 놓인 감자는 외출하기 전 그대로였다. 이유를 물었다. "저는 감자를 캐기만 해서 어느 게 크고 작은 지 구분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는 생각할 필요 없이 시키는 일만 잘하는 노예였다.


감자 캐는 일도 마음가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 시키는 일만 억지로 하면 어떤 감자가 크고 좋은지 생각할 필요 없다. 반대로 내가 주인이라는 마음가짐이면 감자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게 된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월급을 받기 위해 시키는 일을 하는 게 직장인이다. 시키는 일만 하는 직장인이 있고, 시키는 일은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서 해내는 직장인도 있다. 마음가짐의 차이일 것이다. 당연히 후자의 직장인이 월급도 많고 승진도 빠르고 삶도 주도적으로 살 테다.


월급쟁이라도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모르는 직장인 없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의욕이 넘친다. 상사의 눈에 띄기 위해, 더 많이 배우기 위해, 일이 재미있어서 적극 나선다. 하지만 대부분 수직적인 문화 탓에 자라는 새싹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밟히고 만다. 그리고 서서히 타성에 젖고 시키는 일만 하고 결국에 시키는 일마저도 근근이 해낸다. 조직 문화를 탓할 수만도 없다. 타성에 젖어 살지 않는 직장인도 분명 있다. 자기만의 의미와 이유를 찾아 주도적인 삶을 산다.


18년째 같은 일을 하면서 아홉 번 이직을 경험했다. 직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벗어날 용기를 못 냈다. 이직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몇 달 손가락 빨며 놀기도 했었다. 몇 개월 치 월급이 밀리기도 했었다. 새로운 직장을 구하려고만 했지 하고 싶은 일을 찾지도 도전해 볼 용기 안 냈었다. 그때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줄 알았다. 섣부르게 도전했다가는 가족에게도 피해를 줄 것 같았다. 그러니 몇 달 고생해도 같은 일을 계속하는 게 유일한 답이었다. 월급에 의지하는 게 최선이었다. 스스로 노예가 되었다.


여전히 같은 일을 하면서 월급에 의지해 노예로 살아오고 있다. 감자 캐는 재주는 제법이다. 감자를 캘 줄만 알지 농사를 어떻게 짓는지 잘 모른다. 관심도 없다. 감자만 잘 캐도 먹고사는 데 문제없었다. 운이 좋아 이 정도 실력에도 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언제까지 할 수 있냐고 물으면 답을 못한다. 내일 당장 자리를 잃을 수 있는 게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대책 없이 살다가는 대책 없이 나앉게 된다. 그래서 감자 대신 고구마 키우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낮에는 감자를 캐고 새벽과 저녁에는 고구마 농작 법을 익히는 중이다.


고구마에 관심 갖고 텃밭을 가꾼 지 6년째다. 남이 시켜서 시작한 게 아니다. 감자를 대체할 작물을 찾다 보니 고구마가 눈에 들어왔고 나이 들어서도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당장 감자 캐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만든 텃밭에는 고구마 씨만 뿌려놓은 상태라 자칫 굶어 죽을 수도 있었다. 고구마 키우는 걸 감자밭주인에게 들킬까 노심초사해왔다. 다행히 아직 들키지는 않았다. 아마도 내 텃밭에서 먹고살 만큼의 고구마가 자란다면 그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내 텃밭에서 내가 주인이 되어 살겠다고.


나는 나를 고구마 밭을 가꾸며 감자 캐는 노예로 정의한다. 내 삶의 주인이면서 노예의 삶을 사는 중이다. 주인이 되어본 적 없었던 내가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노예의 삶을 벗어나 떳떳하게 내 텃밭을 갖겠다고. 내 텃밭에서 내가 키운 고구마로 내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고. 더 많이 키워 더 많은 사람과 나누며 살겠다고. 고구마는 얼마든 키울 수 있다. 평생 키울 수 있는 방법을 배웠으니 말이다. 매일 읽고 쓰면서 텃밭에 영양분을 공급 중이다. 오늘도 이렇게 비료를 듬뿍 주었다. 고구마가 무럭무럭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도 한 발,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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