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주 《나와 잘 지내고 있나요?》 본문 중)
꿈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꿈은 있었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매달리지 않았다.
어쩌면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다.
어릴 때는 부모 찬스부터 시작한다.
넉넉하지 못했던 살림은 나에게까지 기회가 오지 않았다.
기회가 오지 않았고 포기했다.
다른 방법을 몰랐을 수도, 열정이 없었을 수도 있다.
결국 꿈보다는 현실을 따랐다.
현실감 덕분에 남들만큼은 살아왔다.
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가정을 꾸리고 살 만큼의 월급을 받는다.
월급은 아이들을 꿈꾸게 돕는다.
적어도 내가 갖지 못했던 꿈을 아이들은 잃지 않았으면 한다.
여전히 꿈을 찾는 큰딸, 꿈이 분명한 둘째.
원하는 전부를 해줄 수 없지만 후회는 남기고 싶지 않다.
내가 갖지 못했던 꿈을 아이들은 가졌으면 좋겠다.
어떤 꿈이든 상관없다.
스스로 찾아서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다.
늘 지금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현실보다 이상을 좇았으면 한다.
나처럼 후회 남는 삶을 살지 않길 바란다.
이제 나도 꿈을 꾸고 있다.
어릴 때 꾸었던 꿈과는 다르다.
지극히 현실적인 꿈이기도 하다.
오십을 바라보는 지금 이상만 좇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현실적이면 어떤가, 적어도 꿈이 있다는 게 다행이다.
꿈이 없을 줄 알았던 나도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이 없었다면 지난 6년을 버티지 못했을 것 같다.
꿈을 꾸었기에 내일에 희망을 잃지 않았다.
매일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중이다.
매일 쓰는 삶을 꿈꾸었고 오늘도 이렇게 꿈을 이루고 있다.
나에게 글은 꿈을 이루는 도구이다.
글을 썼기에 작가의 꿈도 이루었다.
글을 썼기에 과거와 다른 아빠가 되었다.
글을 썼기에 하고 싶은 일도 찾았다.
글을 썼기에 오늘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글을 썼기에 더 큰 꿈을 꾸게 되었다.
나였던 그 아이는 아직 내 안에 있었다.
다른 꿈을 꾸면서 여전히 내 안에 있었다.
꿈이 없었던 삶도 살아봤고,
꿈을 가진 삶도 사는 중이다.
어떤 꿈을 갖는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언제까지 꿈을 꿀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도 꿈을 꾸고 있다.
육십, 칠십을 바라보는 누군가도 꿈을 꾸고 있다.
가장 불행한 건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이다.
어릴 적 꿈으로 가득 찼던 그 아이는 어디 있나요?
여전히 함께 있나요?
아니면 잊혔나요?
그 아이는 당신이 손잡아주길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