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 내며 영어책을 들고 나왔다. "답이 없는 문제를 내면 나보고 어떻게 풀라는 거야."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영어 학원 교재가 그럴 리 없었다. 좋게 타이르며 가져와 보라고 했다. 몇 발 걸어오는 동안에도 짜증 나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나도 덩달아 짜증이 올라오는 걸 겨우 눌렀다. 교재를 건네받고 문제를 봤다. 제시하는 문장 중 본문 내용과 틀린 부분을 찾고 바르게 고쳐 쓰는 문제였다. 문제를 풀려면 앞에 나온 예문의 내용을 이해하는 게 먼저였다. 둘째는 아마도 예문을 읽지 않고 대충 문제를 풀려고 했던 것 같다. 차근차근 설명해도 귀를 막았는지 씩씩거리기만 한다. 나도 화를 꾹꾹 누르며 예문을 읽었다. 두 페이지에 걸쳐 짧은 단락 몇 개를 읽었다. 장소에 대한 설명이었다. 식품점이 어떤 곳인지, 우체국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소방관은 어떤 일을 하는지를 설명했다. 문제에 나온 예문은 각각의 예문과 틀린 장소와 역할이 적혀있었고, 예문을 이해했으면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발음도 잘 안 되는 영어 실력으로 근근이 읽어 보였다. 해석까지 해주며 틀린 부분이 어디인지 찾아보라고 했다. 내가 설명하는 동안 화가 조금 누그러졌는지 가만히 듣고 있었다. 문제를 풀어보라고 하니 꿈쩍 않는다. 이해한 건지 이해하기 싫은 건지 속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설명은 다 했다. 이제 스스로 푸는 수밖에 없었다. 둘째도 설명을 듣고는 풀 수 있을 것 같았는지 교재를 도로 들고 자기 방으로 갔다. 고비를 넘겼나 싶었다.
듣고 있던 강의가 끝나고 둘째 방에 갔다. 침대에 엎드린 채 교재에 코를 박고 있다. 문제를 푸는 것 같지 않았다. 훌쩍거리고 있다. 내가 옆에 앉으니 눈물을 쏟는다. 이유를 물었다.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며 문제를 풀기 싫다고 울면서 말한다. 다시 물었다. "정말 이해를 못 해서 눈물이 나는 거니?" 그제야 속마음을 말한다. "영어 학원 가기 싫다고 엄마한테 말했는 데 엄마는 내 말을 안 들어주잖아." 아내도 억울한 면이 있다. 영어 학원을 다니겠다고 말한 것도 둘째였다. 지금 다니는 학원도 한 번 옮긴 곳이었다. 중간에 다니기 싫으면 언제든 말하라고도 했었다. 둘째도 싫다고는 했지만 안 다니겠다고 안 했었다. 우리는 둘째가 학원을 별로지만 영어는 배우고 싶어 한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영어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학원에는 잘 갔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학원을 억지로 다니는 게 전부 엄마가 고집해서 그런 거라고 말한다. 내 딴에는 둘째가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핑계를 대는 걸로 짐작했다. 설령 진심으로 학원 가는 게 싫어졌다면 조처를 해야 했다. 아이의 말이 끝나고 내가 말했다. "내일 수업부터 안 가는 걸로 하자. 아빠는 네가 원하지 않으면 보내고 싶지 않아. 나중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때 다른 곳 알아보자. 학원 숙제 안 해도 돼. 억지로 붙잡고 있어 봐야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거야. 네가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어."
첫째와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언니는 영어 수학 학원을 스스로 원해서 시작했고 3년 넘게 꾸준히 다니고 있다. 아마도 공부에 취미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둘째는 정 반대다. 활발한 성격이고 친구와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잡기에 관심이 더 많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와 멀어지는 게 보인다. 그러니 언니와 비교해 봐야 스트레스만 주는 꼴이다. 그런 탓에 태권도 미술 학원은 빼놓지 않고 다닌다. 어쩌다 시작한 영어가 지금에 와 발목을 잡은 것이다. 아내와 나도 얼마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 공부에 관심이 멀어질 때가 올 거라는 걸. 그때가 되면 쿨하게 인정해 주자고. 하지만 부모 마음이 부침개 뒤집듯 쉽게 바뀌지 않는다. 적어도 최소한의 공부를 해주길 바랐다. 그 조차도 억지로 시킬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조금은 강제해서라도 영어와 수학 기본기는 갖길 바랐다. 욕심을 부렸다. 이제 정말 욕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공부에 소질은 적지만, 대신 춤과 노래, 태권도는 수준급이다. 저녁밥을 먹으며 물었다. 아이돌 노래 중 완벽하게 안무할 수 있는 게 몇 곡이냐고. 15곡 이란다. 매주 주말마다 친구들과 만나 연습한 보람이 있나 보다. 그 밖에도 손재주가 좋다. 가만히 놔두면 이것저것 알아서 뚝딱 만든다. 내가 보기엔 잡동사니 같아 보이지만 제 딴에는 온갖 기술을 동원해 만들어낸다. 결과물을 보면 엉성하기는 해도 제법 그럴듯할 때가 더 많았다. 무언가 만들 때는 오롯이 집중할 줄 안다. 유일하게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다. 그런 모습 때문에 쉽사리 포기가 안 된다. 공부에 조금만 흥미를 붙여주면 잘할 것 같다고 아내와 나는 믿는다. 검증되지 않은 믿음이라 도박이나 다름없다. 일찍부터 예체능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방향을 틀어줘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올해 19살인 조카가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음악에 관심 가졌고 다양한 악기를 배웠다. 중학생이 되면서 베이스 연주에 심취했고 두각을 드러냈다. 학교 수업보다 레슨에 더 집중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검증된 실력으로 굵직한 무대에 섰다. 경기도에서 주관하는 교육프로그램에도 참여했었다. 베이스 연주로 진로를 결정하고는 고입시험도 포기했다. 1년 동안 검정고시를 준비했고 18살에 대학에 입학했다. 최연소이자 최우수 성적으로. 여전히 베이스 연주자로 곡도 만들고 앨범 작업에 참여하고 레슨도 하고 있다. 일찍 진로를 정하고 집중한 덕분에 남들보다 빨리 자기 일을 갖게 되었다.
둘째도 아마 사촌언니 뒤를 따르지 않을까 싶다. 정말로 본인이 원하는 일이라면 일찍부터 실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공부가 아닌 하고 싶은 그 무엇을 위해 열정을 불태울 준비 하는 걸 수 있다. 정말로 원한다면 인정해 주는 게 맞을 테다. 부모 욕심은 내려놓고 아이의 판단을 믿어주는 거다. 해보지 않았으니 나도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못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보는 수밖에 없다. 나와 아내는 선택을 믿고 지지해 주는 거다. 설령 그 길이 아니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게 언제든 지지해 줄 마음의 각오를 하면서 말이다. 무엇을 하든 나처럼 너무 늦은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찾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면서 정말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갖길 바란다.